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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야구

21.11.01 와일드카드 결정전 1차전 직관 후기

  개인적인 사정으로 당분간 경기도에서 살게 되었다. 서울까지의 거리가 매우 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편도 아니다. 잠실 야구장의 경우 어림잡아 한 시간 2~30분 정도가 걸리는데, 6시 30분 경기를 본다고 가정했을 시 이것저것 준비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경기가 시작되기 2시간에서 2시간 반 전까지 집에서 나서야만 한다(곧장 야구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볼일까지 본다고 하면 사실상 점심 먹고 바로 나와야 된다). 막차 시간도 만만찮은 골칫거리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오늘 야구 보느라 지하철 막차를 놓쳐서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그러니 낮 경기도 아닌데 서울까지 야구를 보러 가는 것은 그날 하루를 통으로 날릴 각오가 필요한 행위였다.

  지갑 사정도 영 좋지 않았다. 경기도에 내려와서 보니 노트북 충전기라든가 HDMI 케이블 같은 미묘하지만 은근하게 비싼 것들이 하나둘 사라져 있어 구매해야만 했고, 2년간 데스크탑을 쓸 환경이 안 되는데 갖고 있는 노트북이라곤 문서 탐색기를 돌리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2013년형 삼성 노트북이라 컴퓨터 한 대를 장만해야 됐고, 옷도 몇 벌 필요했다. 여기에 운전면허 학원을 등록하고 지난 30일 날 야구장을 가며 이것저것 과소비까지 하다 보니 빈털터리가 됐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이 대체 야구를 보러 가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가? 조금도 고민할 것들이 아니다. 당장 오늘 경기에서 패배하면 다음은 없다. 키움 히어로즈의 2021시즌은 이대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런 경기를 직관하지 않는다면? 나는 '시간적·물질적으로 직관 갈 환경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영웅군단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보지 않은 팬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내일의 큰일은 내일 생각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티켓을 예매했다.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기온이 낮지 않음에도 굉장히 추웠다...

  예매한 자리의 위치가 다소 애매했다. 분명 외야 펜스 바로 앞 좌석인 줄 알고 구매했는데, 알고 보니 외야석 중에서도 맨 뒷자리였다. 직관이라고 함은 자고로 경기를 구경하기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선수와 팀을 응원하는 맛에 가는 것인데, 이곳은 3루 원정 내야석과도 굉장히 멀었다. 한 마디로 예매 완전 망했

 

 

 

여태껏 경험해본 외야석 직관 중에서 가장 즐거웠다!

  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우선 외야에서도 한가운데 쪽에 위치한 좌석이고, 높은 곳에 있어 그라운드가 한눈에 들어오다 보니 다른 위치의 좌석과는 달리 경기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내야석과 포수 뒤쪽 3층 좌석에서는 좀처럼 알아보기 어려운 투구&타격이 시원시원하게 보였고, 수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가장 우려했던 응원 문제도 오늘 전체적으로 키움 팬분들의 응원 열기가 뜨거워 그 열정이 외야석의 키움 팬들에게도 전염됐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시를 들어보자. 오늘 잠실야구장 정말 추웠다. 이제 정말 겨울이 찾아왔구나 따위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도 덜덜 떨다가 대체 몇 도인지 궁금해서 날씨를 확인했는데, 막상 최저기온은 15도길래 어리둥절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는데

 

 

 

  이럴 수가! 알고 보니 키움 팬들의 응원 열기가 너무 뜨거워서 날씨 어플리케이션이 맛이 간 모양이었다. 그저께 정규시즌 마지막 홈경기를 보러 갔을 때도 '육성 응원을 못 하는데 이렇게 흥겨울 수 있구나~'라는 감상이었는데, 오늘은 잠실 야구장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엉덩이뼈가 분쇄 골절될 정도로 트월킹을 출 만큼 신이 났다. 

 

 

 

경기는 두산 쪽으로 기울고...

 

 

  포스트시즌은 연장 15회까지 있다지만 9회 말을 조상우가 막는다고 해도 남은 6이닝을 무실점으로 걸어 잠글 투수가 없기에 득점이 필요했던 4:4, 9회 초. 선두타자 이지영과 대타 박동원이 내야 땅볼로 물러나며 순식간에 아웃 카운트 두 개가 채워졌고, 관중석은 정적에 잠겼다. 심지어 김정석 응원단장이 앞에 있는 내야 응원석마저 분위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야석의 이름 모를 꼬마 키움 팬이 목청껏 "이용~규! 안!! 타!!!"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은 외야의 키움 팬들이 하나둘 이용규를 부르짖었고, 오후 10시가 넘어 앰프가 꺼진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응원의 열기가 금세 야구장 전체에 퍼졌다. 키움의 패색이 짙어 보이던 분위기가 미묘하게 일그러진 것도 이때라고 생각한다. 이용규는 7구 승부 끝에 볼넷을 얻어 걸어 나갔다.

 

 

 

한줌의 외침은 어느덧 방역 점검차 야구장에 들른 문체부 장관님을 정색하게 만들 정도의 떼창을 번지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모두의 간절함은 결국 기적을 만들어냈다. 고백하자면, 이용규의 타석을 녹화할 때부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정규이닝의 마지막 공격에서 주자 출루 없이 2아웃까지 몰려버린 데다가 한 방으로 열세를 뒤집을 강타자도 나오지 않으니, 여기서 무언가 해내리라는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키움의 2021시즌 마지막 타석이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착잡한 심정으로 영상을 녹화했다. 김혜성 타석 때도 그랬다.

  하지만 이정후의 타석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날 이정후는 직전 타석까지 3타수 무안타로 부진했지만, 관중석은 이정후가 결국 해내리라는 근거 없는 기대감이 충만해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정후는 정말 만화보다 더한 역전극을 보여줬다.

 

 

 

  9회 말에는 정말 관중석의 모두가 기가 빨릴 대로 빨린 나머지 응원이 아닌 애원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저기서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빌며 "상우야~! 집에 좀 가자~!!!"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나도 거의 주저앉다시피 하며 경기를 봤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은 끝에, 기적의 산증인이 되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께서는 다들 행복하신지요? 저는 야구를 보다가 막차가 끊기는 바람에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집에 왔고 이 글 쓰느라 다섯 시간도 못 잘 테지만, 그럼에도 혀뽕을 치사량 직전까지 맞아서 정말정말 행복합니다. 홍원기 감독님께서는 부디 내년에 제2의 삶을 시작하시기를 바라며, 아무튼 내일 경기도 재미나게 보고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