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포츠/야구

21.11.02 와일드카드 결정전 2차전 직관 후기

  2년 넘게 얼굴을 보지 못했던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오늘이 지나가면 또 얼마나 오래 못 볼지 몰라, 와일드카드 2차전이 시작되고도 조금 오랫동안 종합야구장 역으로 떠나지 못했다. 정규시즌 막판의 시원한 연승 행진으로 가을 야구 막차에 탑승한 것으로도 모자라 와일드카드 결정전 1차전에서 감격스러운 승리를 따냈으니, 더 이상 올 시즌의 히어로즈에 대해 미련이 없었다.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틀 연속으로 지하철 막차를 놓쳐 광역버스로 집에 가고 있는 지금 돌이켜보면, 실은 2021년의 키움 야구에 더 미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깔끔한 추억으로써 올해의 영웅들을 추억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에 하나 오늘 야구장에 갔다가 키움이 처참한 점수 차로 패배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라도 했다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올해의 프로야구 또한 배드 엔딩으로서 기억에 남을 테니까.

  서론이 길었다. 보고 싶었던 사람과 헤어진 뒤 종합운동장역으로 향하는 전철을 탔을 때는 이미 4점을 헌납하며 싱숭생숭한 분위기 속에서 끌려가고 있던 상황이었다(그리고 야구장에 가는 동안 5점을 더 내줬다). 어제도 워낙 늦게 귀가했고 내일 아침 일정이 있으니 그냥 집에 갈까 싶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잠실야구장에 가는 전철에서 내리지 않았다.



처참한 점수 차였다. 잠실의 밤 공기는 지난 밤보다 훨씬 찼다.



FA 혹은 트레이드로 팀을 떠나기 전에 다시 2017년~2018년의 포스를 보고 싶은 최원태.

  경기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정찬헌과 한현희가 차례로 무너진 뒤, 최원태가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2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토종 에이스로부터 멀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선배이자 투수조 조장의 배변을 치우고 있던 이 순간만큼은 애틋하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어지는 두산의 공격 때 최원태는 4실점 후 강판됐다.




어쩌면, 암흑기 시절의 강정호보다 더욱 존재감이 거대할지도 모르는.

  어제 경기에서 이용규, 김혜성과 함께 와일드카드 셧업의 위기로부터 팀을 구했던 이정후는 오늘도 싹쓸이 2루타를 쳐내는 등 4안타로 분전했다. 다소 응원의 의지를 상실한 듯한 팬들도 이정후가 타석에 들어서면 다음 날 목이 나갈 만큼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악몽 같았던 6회 말에는 누군가 투수가 아닌 이정후에게 이닝을 끝내달라며 애원할 정도였다.
  좀처럼 대형 신인이 나오지 않던 2010년대 중반 KBO리그의 슈퍼 루키, 이종범을 '정후 아버지'로 만들어버린 미래의 국가대표 1번 타자, 김하성과 함께 비전이 보이지 않는 팀 타선의 두 줄기 빛이었던 남자는 이제 그런 존재로 성장했다. 2010년대 히어로즈의 박병호와 같은 존재. 그러니까 질질 끌려가고 있는 경기라도 '이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면 뒤바뀔 수 있다'라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버건디 물결을 더욱 일렁이게 만드는 에이스.
  올해의 이정후는 작년의 이정후보다 강해졌고 이번 와일드카드 결정전 동안의 이정후는 정규시즌 때의 이정후보다 강했다. 내년의 이정후는 모두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언가로 성장할 것 같다.



  야구는 결국 팬 스포츠라서인지, 지난 이틀 동안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올라가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던 선수단을 보면서도 많이 울었지만 무엇보다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에 적잖이 감동하고 또 눈시울을 붉혔던 것 같다. 어제는 9회 말 2아웃 상황에서 하나둘씩 이용규 안타를 외치더니 결국에는 함성 소리로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모습을 보며 울었고, 오늘은 경기 초반부터 큰 점수 차로 패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선수단에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님을 각인 시켜 주는 모습에 울었다.



통통거리는 소리와 짝짝 박수 소리가 합쳐져 이런 웅장함을 연출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8회 초 즈음부터 오후 10시가 지나 앰프가 꺼젔고, 어제 경기의 여파로 육성 응원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든 말든 우리 팬들에게는 핑크 응원봉이 있었고 응원 열기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2021시즌의 마지막 공격...


  기분 좋은 연승으로 가을야구 막차에 탑승하고 1차전에서 짜릿한 승리를 거뒀으니 홀가분히 마지막을 지켜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보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선수단과 팬들을 보며 울컥했고 또 많이 속상했다. 내년에는 히어로즈가 꼭 우승컵을 들어 올렸으면 좋겠다. 홍원기 감독님께서는 분에 넘치는 자리 1년간 지키고 계시느라 고생 많으셨고 야구계를 떠나서도 행복한 제2의 삶 살아가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