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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포스트 타이거 JK : 제임스 안

(사진 출처 : 제임스 안 인스타그램)

  한국 힙합계의 역사를 뒤집어놓은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의 10번째 시즌이 드디어 끝을 맺었다. 어설프게 힙합스러움을 추구하던 슈스케 짭 예능으로 시작한 쇼미더머니가 의도적으로 힙합스러움을 배제한 프로그램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면, 10년이라는 세월의 깊이에 대해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지난 시즌의 대성공과 '디 오리지널'이라는 거창한 캐치프라이즈에 설렘을 느끼며 시청했다가, 파이널까지 '오리지날 힙합'은 온데간데없이 락과 팝 그리고 싱잉으로 범벅인 무대를 지켜봤던 마니아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회수는 잘 나왔고 화제성 또한 여전했으며 음원 차트는 올킬까지 달성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러니 설령 내년에 쇼미11이 제작되고 그 프로그램의 정체성이 더욱 옅어진다 한들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영상 출처 : Mnet TV 유튜브 채널)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인해 공연수입까지 전무한 상황 속에서 1년 동안 칼을 갈고 나왔을 수많은 언더래퍼들이 기껏해야 3초 정도 비춰지고 탈락하거나 통편집 당했다. 카메라는 2000년대 후반 슈퍼루키 MC 출신 래퍼에게 싱잉을 요구하는 프로듀서의 모습을 담기 바빴고, 시청자들도 그러한 장면에 몰입해 수많은 예선 탈락 래퍼들을 잊어갔다. 가능한 한 많은 무명 실력자들을 포커스했던 쇼미9와 비교하면 올해는 화제성 낮고 실력 좋은 지원자들에게 가혹한 시즌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방에는 랩을 하는 장면이 단 5초도 나오지 않았으나, 엠넷 공식 유튜브에 올라온 2차 예선 지원자 132인 무대 10초 미리보기 영상만을 통해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 방송에 나오기 전까지 힙합신에서 인지도가 있던 사람도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한 믹스테잎 조회수가 세자리수일 정도로 무명이었다. 유명 레이블에서 전략적으로 밀어주는 준비된 신인도 아니었다. 한때 타이거 JK와 윤미래가 대표이사인 필굿뮤직 소속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아티스트가 아닌 일반 직원이었다. 방송에서 남의 무대를 보며 리액션하는 모습을 전부 합쳐도 이번 시즌 통틀어 1분조차 분량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떴다. 2차 예선 무대 10초 미리보기 영상이 올라왔을 당시 무명 참가자들 중에서 비오와 함께 큰 주목을 받았고, 이후 단 한 번도 방송에 잡히지 않자 안달이 난 사람들이 따로 잘라서 올린 10초짜리 2차 예선 영상의 조회수가 30만을 넘었다. 비트의 리듬을 타며 고개를 까딱이다가 내뱉은 한 마디, "one for the old school but I ain’t no 꼰대/homeboy ludens microphone 재껴 boom bap"으로 수많은 사람을 매료시켰다. 힙붕이도 그 매료당한 사람 중 한 명이라서 이 글 쓴다.

 

 

■ 제임스안, 그는 누구인가?

제임스 안의 첫 믹스테잎 &amp;amp;lt;Multiple Self&amp;amp;gt;의 앨범 아트. (이미지 출처 : 제임스 안 인스타그램)

  '멋진 어머니'와 '차원이 다른 아버지', 그리고 의사 형을 둔 유복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UNSENT). 초등학교 4학년 때 캐나다로 유학을 갔으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경영학 학사 과정을 수료했다. 금융계에 취직해 탄탄대로의 삶을 걸을 수 있었으나 예술에 뜻을 갖고 하버드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생 시절에는 교육학과 예술을 병행하며 '힙합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사용해서 젊은 학생들이 인종차별과 싸울 수 있을까'에 대해 공부했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했다. 래퍼 활동 외에도 산문 작가로써 문학과 관련된 뉴미디어 프로젝트에 참여했고(문과문),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Dangerous to Know). 그중 가장 활발한 분야는 힙합으로, 홈보이루덴스 크루에서 활동하며 두 장의 믹스테잎과 네 장의 싱글앨범을 냈다. 쇼미더머니 참가는 이번 시즌이 세 번째였다.

 

 

■ 제임스안과 타이거JK의 공통점

힙합 교육 컨퍼런스에서 타이거 JK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제임스 안. (이미지 출처 : 제임스 안 인스타그램)

  이 얘기 적고 싶어서 글쓰기 시작했다. 제임스 안은 요리 보고 조리 보고 아무리 봐도 18년 늦게 태어난 타이거 JK다.

 

  두 명 모두 굳이 래퍼의 길을 걷지 않았더라도 잘 먹고 잘살았을 엘리트다. 저명한 음악 평론가 아버지(서병후 씨)와 와일드 캣츠의 리더였던 어머니(김성애 씨) 사이에서 태어난 타이거 JK는, 초등학생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뒤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 중 하나인 UCLA에서 학사 과정을 밟았다. 타이거 JK가 한창 잘나가던 당시 소속사 정글엔터테인먼트로부터 약 50억 원을 사기당해 힘든 생활을 보냈음을 생각하면, 예술가가 되지 않는 편이 경제적으로 더욱 행복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제임스 안 또한 초등학생 때 유학을 갔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재학 당시 와튼 스쿨을 다녔고,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땄다. 굳이 대학원에 가지 않았더라도 본인 말마따나 월 스트리트 취업이 가능했을 것이며 하버드를 나온 이후에도 무궁무진한 엘리트 루트가 기다리고 있었을 테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래퍼로서의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내 학벌 하나로 굶어 뒤질 일 없지 그건 솔직히 인정/그 이름보다 유명해지기 어려울 것 같은 나쁘지 않은 기분/날 저버린 희망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너의 편견/불공평 한 세상 덕에 난 오늘도 내 특권을 지켜내/.../돈은 존나 벌어야 하는데 쓸모 없는 시집 먼저 내야하는 난데 - JOKE

 

  둘 다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랩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됐다. 타이거 JK가 본격적으로 랩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92년 LA 폭동 당시 한국계 미국인과의 갈등의 골이 깊었던 흑인들 앞에서 당당히 랩을 뱉은 것이었다. 당시 LA는 흑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빠, 유명 흑인 래퍼 아이스 큐브가 'Black Korea'라는 곡을 발표할 지경이었다. 이에 타이거 JK는 LA에서 열리던 연례 힙합 페스티벌에 참가해 한인 비하에 대해 반박하는 'Call Me Tiger'를 불렀고, 이 곡으로써 즉흥 랩 부문에서 상을 받고 쟈니 윤 쇼에 초대되는 등 큰 화제를 얻었다.

  제임스 안이 래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지는 몇 년이 됐지만, 그가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게 된 계기는 몇 달 전 엠넷에서 유튜브에 업로드한 쇼미더머니10 2차 예선 10초 미리보기 영상을 통해서다. 2차 예선 당시 제임스 안이 부른 노래는 Ye La Soul과 Absint가 참여한 Monkey Boombap이라는 곡인데, 해당 곡에서 제임스 안은 'BLM 운동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곡이 유튜브에 올라온 시기(2020년 10월 30일)를 생각하면 2020년 여름에 범세계적 이슈가 됐던 BLM 운동을 언급하는 게 맞는 듯하다. 한편 제임스 안은 유튜버 맥랩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석사 과정 당시 힙합으로써 젊은 학생들이 인종차별과 싸우도록 하는 방안에 대해 공부했다"고 이야기했다.

 

along with all my haters black lives matter/반대하는 young 꼰대s I'll educate you later/uneducated kid 아닌 다른 role model/공부 열심히 해서 spread love and peace

 

않이 솔직히 서조단이 커서 예명으로 제임스 안 쓰고 나이 속이고 쇼미 나왔다고 해도 믿을듯;;; (이미지 출처 : 엠넷 공식 유튜브 채널)

  마지막으로... 걍 다 필요없고 둘이 생긴 것부터 닮았다......... 타이거 JK 20대 후반~30대 초반에 수염 하나도 안 길렀을 때 사진 보면 그냥 지금 제임스안이랑 완전 똑같이 생겼다. 키도 비슷하다. JK가 180이고 제임스 안은 178이다. 아니 외모만 닮았어도 "뭐야...? 타이거JK가 자가복제해서 제임스 안으로 나온 거야...?! (술렁술렁)" ← 이런 반응 충분히 나올 수 있는데 둘이 '어려서 유학 가고' '대박 말도 안 나오는 명문대 다니고' '인종차별 이야기하는 랩으로 유명해진' '미친 붐뱁퍼'라는 프로필이 완벽히 일치한다??? 이건 진짜,,, 말이 안 나온다,,,,,,,,,

 

 

■ "공부 열심히 해서 Spread love&peace"

(이미지 출처 : 유튜브 &amp;amp;lt;원터뷰WONterview&amp;amp;gt;)

  힙합의 고장에서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겪었던 20대 청년은, 한국에 힙합 장르를 대중화함으로써 한국인들이 음악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을 토대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고민한 20대 청년은 힙합으로써 인종차별의 해결법을 제시하려고 한다.

 

부패한 이 곳에 내 존재 K방역 spray/no pain no gain but 내 앞에서 no flex/내 학벌 좆돼/(...)/pistol play ricochet 지금 내 주머니에/pickpocket 할 수 없을 만큼 장학금 i get it poppin' - 대기실 Cypher

 

  제임스 안은 자신의 첫 믹스테잎부터 대중의 호응을 끌어냈던 2차 예선, 그리고 쇼미더머니10 탈락 후 발매한 곡(대기실 Cypher)에서까지 일관된 학벌 스웨그를 보여줬다. 돈, 명품, 파티, 섹스 등의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철저히 자신의 학벌에 대해서만 Flex 할 뿐이다.

 

제발 그만해 microphone check 쓸데 없는 flex stop it/내가 돈 줄 테니 가서 사 읽어 책 - 대기실 Cypher

반대하는 young 꼰대s I'll educate you later/uneducated 아닌 다른 롤 모델/공부 열심히 해서 spread love and peace - Monkey boombap

 

 힙합 교육 콘퍼런스에 참여해가면서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연구하던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제임스 안이 추구하는 힙합이 무엇인지에 대해 추측할 수 있다.

  그는 힙합이라는 장르가 그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기를 원한다. 20세기 후반 미국 할렘가에서 탄생해 대중문화의 주류로 자리 잡은 흑인 음악 힙합이, 단순히 Hip hop에서 머물지 않고 '소외된 모두의 왼발을 한보 앞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사회적 장치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렇기에 힙합을 1차적으로 소비하며 흑인 음악을 소비하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는 외면하는 이들에게 학벌 FLEX를 외쳤던 것이 아닐까.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랩에 녹여내면서도 대중성까지 사로잡은 타이거 JK를 롤모델로 삼았던 것이 아닐까.

 

  래퍼 제임스 안의 커리어는 리스너들이 그의 2차 예선 10초 미리 보기 영상에 주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달 전까지의 그는 세 자리수 조회수의 믹스테잎 두 장과 네 곡의 싱글 음원을 가진 무명의 고학력 래퍼였지만, 이제는 자신의 노래에 주목하고 호응해줄 잠재적 관중을 갖게 됐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좋은 음악으로 대중들을 사로잡고, 본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각인시키는 것뿐이다. 회사 사장님 타이거 JK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