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PC방 문화가 자리 잡은 배경으로는 개인이 가정에 PC를 장만하고 인터넷 전용선 사용료를 내기 부담스러웠던 90년대 중반의 인프라적 문제, 수많은 직장인들을 자영업의 장에 뛰어들게끔 만들었던 1997년 외환 위기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한국 PC방의 흥행 요인은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2>와 같은 온라인 게임의 선풍적인 인기였다.
초창기의 PC방은 넥슨에서 세계 최초의 그래픽 온라인 게임이라고 홍보했던 <바람의나라>, 출시 직후 패키지 게임 시장의 불모지 한국에서만 100만 장을 팔아치운 <스타크래프트>, 전 세계 최초 동시접속자 10만 명 돌파라는 기록을 세운 <리니지>, 그리고 <디아블로2>의 공간이었다. <스타크래프트>는 e스포츠의 출범과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의 등장을 이끄는 등 온라인 게임 업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바람의나라>와 <리니지>는 각각 넥슨과 NC소프트의 황금시대를 열어줬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1999년이 아닌 2022년 6월이며, 위 게임들이 한국의 PC방과 온라인 게임 시장의 흥행을 이끈 지도 어느덧 20년이 지났다. 찬란했던 과거의 업적은 이제 빛바랜 영광이 되었다. <스타크래프트>는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후속작까지 출시되었으나 원작과 같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고, RTS 장르가 쇠퇴함에 따라 올드 게이머만 남아서 플레이하는 게임이 되었다. <디아블로> 역시 2012년 신작이 출시되었을 때 한정판 패키지를 구매하려는 사람들로 왕십리가 북새통이 되는 등의 진풍경을 연출했지만, 전작의 흥행에 미치지 못하며 예전과 같이 PC방을 지배하는 데 실패했다.
<리니지>는 중년 게이머와 1~20대 게이머 간의 세대 갈등을 촉발했다. 2016년에 출시된 <리니지 2 레볼루션>을 시작으로 <리니지M>(2017), 리니지2M(2019) 등 P2W을 극한으로 추구한 모바일 게임들이 상업적인 면에서 대성공을 거뒀고, 이를 기점으로 국내 게임사가 너도나도 리니지라이크 게임을 개발하기 시작하자 그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NC 소프트는 <블레이드 앤 소울>, <트릭스터> 등 게임성 면에서 리니지와 거리가 있던 게임들도 리니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리메이크했고, 그 결과 게이머들에게 외면받으며 충격적인 주가 대폭락을 겪었다. '리니지'는 이제 젊은 게이머들에게 있어 게임성보다 수익성을 추구하는 게임을 가리키는 혐오의 대명사가 되었다. 안 그래도 세대 갈등이 가장 심각한 나라인데 NC 소프트를 비롯한 '리니지라이크' 게임 개발사의 기를 살려주는 중년 게이머의 모습이 좋게 비칠 리 없었다. 1~20대 게이머들은 중·장년 게이머를 '린저씨', '개돼지 게이머' 등의 멸칭으로 부르며 배척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디아블로 시리즈의 10년 만의 신작 겸 첫 모바일 게임인 <디아블로 이모탈>이 출시되었다. 개발사인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는 2010년대부터 사건사고와 실책이 끊이지 않으며 이미지가 바닥까지 추락한 상황이며, 이모탈은 '엔드 스펙'을 맞추기 위해 천문학적인 과금이 필요한 P2W 게임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출시되자마자 메타크리틱 유저 스코어가 0점대로 추락하는 등 최악의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결국 <디아블로 이모탈>은 P2W 게임을 혐오하는 1~20대 게이머로부터 철저히 외면받고 말았다. 안 그래도 올드해보이는데 깊게 파고들려면 무시무시한 과금까지 요구하는 게임을 플레이할 이유가 없었다. '린저씨'로 불리는 게이머들에게도 큰 홍응을 얻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리니지라이크' 게임에는 필드 PVP 컨텐츠 등 과금을 한 만큼 다른 유저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게끔 해주는 장치가 있는데, 이모탈에는 그러한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오픈 베타 첫날에만 해도 모든 서버마다 대기열을 미어터지게 하던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가, 이제는 인스턴스 던전 한 번 가기 위해 파티원을 모집하는 것도 고된 일이 되었다. 지갑 사정은 조금 궁핍할지언정 시간은 많은 젊은 코어 게이머도, '린저씨'도 이모탈을 플레이할 메리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서버에는 수십 년 전 디아블로를 즐겁게 플레이했던 추억을 가진 아재 게이머들만이 남아 있다. 2~3년 전 <디아블로3>을 즐겁게 했던 기억이 있어 '메인 스토리만 밀고 지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게임을 설치했다 이들을 만났고, 살면서 가장 3~50대 게이머들과 많이 부대끼며 지내는 2주일을 보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디아블로 이모탈>이라는 게임 자체는 크게 인상 깊지 않았다. 한때 디아블로 시리즈가 최고의 핵 앤 슬래시 게임이었던 것은 맞지만 과거의 영광일 뿐이며, 그 사이에 <로스트 아크>나 <패스 오브 액자일> 같은 웰메이드 게임이 많이 나왔다. 한편 이모탈은 <디아블로3>의 그래픽 리소스를 상당수 재활용한 주제에 그 퀄리티는 전작보다 훨씬 떨어지며, 게임성 또한 11년 전에 비해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 스토리는 2와 3 사이의 공백을 다뤘지만 크게 흥미롭지 않았다. 모바일-PC 크로스 플레이를 지원하지만 <원신 임팩트>나 <던전앤파이터 모바일> 같은 게임과 비교하면 PC 클라이언트의 완성도가 매우 조악했다. 솔직히 말해서 디아블로 팬이 아니라면 플레이를 권유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메인 스토리의 엔딩을 볼 때까지 게임을 붙들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디아블로에 대한 순수한 추억을 간직한 '아재 게이머'들과 한 데 섞여 복작복작 게임을 하는 게 즐거웠던 덕분이었다. 20년은 유행이 지났을 인터넷 문체로 대화를 나누는 아저씨들을 구경하고, 가끔 한두 마디씩 거들면서 대화에 끼기도 했다. '디아블로'라는 소재는 그들과 나 사이의 2~30년이라는 간격을 이어줬다. 이모탈이라는 리니지식 P2W 괴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평생 서로를 '이대남', '오팔육' 같은 단어로 서로를 재단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다만 나 이외에 다른 1~20대 게이머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있었던 서버는 오픈 직후 첫 이틀 정도만 1~20대로 추정되는 유저가 보였고, 그 뒤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니 디아블로 이모탈을 플레이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대악마이자 공포의 군주인 디아블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11년간 신작 디아블로 시리즈를 기다려온 영겁의 중장년 게이머였다.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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