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SENS - [저금통] (2023)

2023년은 한국 힙합 팬들에게 있어 축복과도 같은 한 해였다. 연초부터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SHOW ME THE MONEY 11'을 통해 이름을 알린 신예 래퍼 Fleeky Bang과 힙합 씬의 트러블메이커 NO:EL의 디스전이 터지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고, 'SHOW ME THE MONEY 11'에 프로듀서로 출연했던 Jay Park과 Slom이 방송 당시 발표한 음원을 리믹스한 EP [SLAY HOUSE REMIX]와 VMC가 레이블을 해체하면서 마지막으로 내놓은 컴필레이션 EP [9th Wonder]가 빼어난 퀄리티로서 각각 신·구 힙합 팬의 귀를 즐겁게 했다. Zior Park의 EP [WHERE DOES SAQUATCH LIVE? PART 1]이 뮤직비디오 조회수만 1300만 회를 넘긴 타이틀곡 "CHRISTIAN"의 메가 히트와 함께 대흥행했으며, 일리네어 레코즈 탈퇴 후 방황하던 Dok2가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심경을 담담히 담아낸 믹스 테잎 [THE CORE TAPE, Vol. 1] 또한 거듭된 구설수로 지쳐가던 청자들을 음악만으로 감동시켰다.

 

 

 

이센스가 자신의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담긴 앨범 커버. '저금통'이라는 제목으로 인해 이센스가 주식 차트 등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에 대해 유추하게 만든다. 셀 수 없이 수작과 명작이 쏟아졌지만, 이센스의 사진이 러프하게 담긴 앨범 한 장을 이기지 못했다.

거의 매달마다 수작 이상의 앨범이 최소 한 장씩 나왔다. 3월에는 lobonabeat!의 정규 1집 [Trapstar Lifestyle]이 "한국 힙합 씬에서 트랩을 내세운 앨범 중 가장 잘 빠진 앨범"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음반·노래 분야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SHOW ME THE MONEY 11' 출연으로 주목받았던 ShyboiiTobii의 첫 번째 EP [DOPEBOii]가 루키에 불과했던 래퍼 본인의 위상을 한국힙합어워즈 선정 올해의 신인으로 끌어올렸다. 4월에는 1세대 래퍼 넋업샨의 첫 번째 정규 앨범 [NOT REALLY NOW NOT ANYMORE]이, 5월에는 현세대 래퍼 중 가장 트랜디한 랩을 하는 Kid Milli의 정규 2집 [BEIGE]가 발표됐다. 8월에는 H1GHR MUSIC을 나오고 KC를 차리며 홀로서기에 도전한 Sik-K의 정규 3집 [POP A LOT]이 나왔으며, 9월에는 같은 나이대 래퍼 중 독보적인 커리어를 갖고 있는 unofficialboyy가 군 입대 전 마지막 정규 앨범 [MYEdrugonline]을 발매했다. 10월에는 스카이민혁의 [해방]이 "예술 작품이 한 인간을 넘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마다 분투하고 있는 모든 이를 해방해 줄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라는 평과 함께 2023년의 가장 충격적인 한국 힙합 앨범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11월에는 DEAN이 4년 6개월의 공백기 끝에 싱글 "DIE 4 U"를, 12월에는 Zion.T가 5년 만의 정규 앨범 [Zip]를 발매했다. 이 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앨범이 호평 세레를 받았다.

 

 

 

앨범 후면에는 하단의 간략한 트랙 리스트와 함께 매우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작업이 진행됐음을 보여주는 사진이 담겨 있다. 홍대에서 우연히 만나 즉흥적으로 시작했다는 허키 시바세키(Hukky Shibaseki)와의 작업은 2023년 최고의 합작 앨범을 낳았다.

크루 혹은 레이블 단위의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국식 붐뱁 음악을 추구하는 크루 서리(30)가 신규 멤버로 딥플로우를 영입하는 동시에 정규 앨범 [THE FROST ON YOUR EDGE]를 발표했고, 스윙스가 설립한 AP Alchemy가 컴필레이션 앨범 [AP Alchemy : Side A]와 [AP Alchemy : Side P]를 연달아 내면서 힙합 리스너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200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에서 이름을 날렸던 레이블 소울커넥션이 14년 만의 음원 "제로힙합"을 발매했고, lobonabeat!를 중심으로 BILL STAX, oygli, Hecop 등이 뭉친 레이블 스꺼러갱 비즈니스의 첫 컴필레이션 앨범 [Skreet Knowledge]가 화려하게 연말을 장식했다. 한국 시장에 진출한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Spotify)가 힙합플레이야와 협업하여 런칭한 프로젝트 [HAN]은 힙합이라는 장르가 한국 음악계에서 얼마나 거대한 입지를 차지하게 되었는지를 똑독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앨범 커버 후면, 부클릿, CD 모두 매우 심플하다. 이센스 역시 4년 만의 복귀임에도 불구하고 가타부타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훌쩍 돌아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힙합 팬들이 축배를 들게 만든 것은 빈지노와 E SENS의 동반 복귀였다. 각각 200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중반에 처음 청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두 아티스트는 데뷔로부터 20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힙합을 대표하는 간판스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나, 아쉽게도 2010년대 중반 이후의 활동은 빈말로도 활발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빈지노는 입대하는 날에 재지팩트로써 발매한 EP([Waves Like](2017))를 마지막으로 EP 단위 작업물이 5년간 전무했고, 이센스 역시 2019년의 정규 2집 [이방인]이 사실상 마지막 작업물이었다(※ 2020년 EP [Marigold Tapes]는 기존의 무료 공개 곡과 미공개 곡을 엮어 음원 사이트에 발매한 것임). 가끔씩 피처링으로 참여하는 것을 제외하면 전무하다고 해도 무방한 활동으로써 팬들을 애태우던 두 거물이, 비슷한 시기에 정규 앨범 발매를 예고하더니 단 10일 간격으로 [NOWITZKI]와 [저금통]을 내놓은 것이었다. 

 

 

 

컨셉 아트와 작업 사진이 담긴 부클릿.

두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NOWITZKI]는 발매 직후 약 20시간 만에 음원 플랫폼 멜론에서 100만 스트리밍을 달성하면서 멜론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유튜브 인기 급상승 음악 1~3위를 석권하는 등 대중적으로 대성공한 모습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음악으로서의 완성도 또한 빈지노의 역대 디스코그래피와 견줘봐도 최고라는 평과 함께 연말 시상식에서 각종 상패(2024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최우수 랩&힙합 음반, 2024 한국 힙합 어워즈 올해의 힙합 앨범)를 쓸어 담았다. Apple Music에 의해 '국내 최정상 래퍼의 귀환'이라고 소개된 [저금통]은 평론가와 동료 아티스트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이미 한국 힙합 1위인 이센스가 더 발전해서 돌아왔다'라며 놀랄 정도의 퀄리티를 뽐냈다. [NOWITZKI]가 한국 힙합계 최고의 '아티스트' 빈지노를 더욱 빈지노답게 만든 앨범이라면, [저금통]은 한국 힙합계 최고의 '래퍼' 이센스를 더욱 이센스답게 만든 앨범이라는 이야기였다. 

 

 

 

전작과 비교해 달라진 가사 스타일은 호불호 여론을 낳기도 했다.

전작인 [The Anecdote], [이방인]과 비교하면 [저금통]은 조금 더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이지 리스닝' 앨범이다. 앨범을 제작하는 과정 또한 하나의 커다란 대주제를 정해놓은 다음 프로젝트처럼 이를 철저히 따라갔던 정규 1집, 2집에 비해 훨씬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부분이 기존의 이센스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호불호를 형성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을 감상할 때 오롯이 음악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하면서 듣기를 즐겨하는 힙합 팬이라면, 가사를 곱씹으며 듣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센스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저금통]은 플레이리스트에 올릴 한국 힙합 노래를 고를 때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