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납장/음악

빈지노 - [Nowitzki] (2023)

채신영 2024. 7. 30. 14:12

빈지노의 연인 스테파니의 사진을 그대로 넣어놓은 앨범 커버.

전업 예체능의 길을 택한 사람은 젊었을 때 자존감과 현실 사이의 거대한 괴리감 사이에서 질식할 가능성이 크다(사실 현실에 타협하고 취미로만 삼아도 그렇다). 거대한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가수, 신간을 낼 때마다 서점의 신간 매대에 책이 올라가는 작가는 극히 소수다. 대다수는 동갑내기의, 혹은 자신이 펜이나 마이크를 잡은 지 수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동안 어린 나이에 신예로 주목받게 된 이들을 말 없이 지켜보며 열등감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이는 현실의 혐오감에 충만된 끝에 손에 쥔 것을 부러뜨리고 매일 아침 출근하는 삶으로 선회한 사람에게도, 꿋꿋이 가사지나 원고에 글씨를 써 내려가는 이들에게도 모두 해당하는 이야기다.

 

 

 

빈지노가 백지 위에 트랙리스트를 끄적인 것만 같은 앨범 후면.

그렇기에 오랜 기간 내면에 쌓인 이야기를 타인 앞에 정제해서 작업물로써 내놓을 수 있을 정도의 예술적 기량을 갖게 된 이들은, 종종 '예술가가 아닌 사람인 나'의 이야기를 다소 수줍게 선보이곤 한다. 장르 팬이 아닌 사람 사이에서는(혹은 일부 장르 팬 사이에서도) 흔히들 '허세를 부리고 자신의 거친 남성미를 뽐내는 마초적인 장르가 아니냐', '저항 정신이 뿌리로서 자리 잡고 있지 않느냐'라고 생각하는 힙합 음악 또한 그렇다. 한국의 그래미를 표방하는 한국대중음악상(KMA)의 최우수 랩&힙합 - 음반 분야에 이름을 올리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매년 그 앨범을 발매하기 전까지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던(혹은 무명이었던) 아티스트의 자전적인 작품이 하나씩 후보에 포함되어 있다. 2024년 KMA에서는 스카이민혁의 [해방]이 그랬고, 2023년에는 이현준의 [번역 중 손실 (LOST IN TRANSLATION)]이 그랬다. 2022년에는 씨잼과 비와이라는 한국 힙합 씬 최고의 랩스타를 절친으로 둔 최엘비가 [독립음악]을 발매해 주목받았다. 

 

 

 

앨범 내부에 적힌 크레딧 역시 빈지노의 손글씨로써 쓰여 있다.

빈지노는 처음 힙합 가수로 데뷔했을 때부터 스윙스, 이센스와 함께 슈퍼 루키로서 주목받았다. 애초에 래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힙합 커뮤니티에 올린 자작곡을 사이먼 도미닉이 듣고 그에게 연락했기 때문이었음을 생각하면, 빈지노는 앞서 언급한 이들과 비교했을 때 열등감과 매우 거리가 먼 래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일반인이 질투할 정도의 재능을 가진 이들도 결국에는 똑같이 사고하는 사람이고,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고민을 갖고 있다. 마이크를 잡기 전의 빈지노는 대학생이었고, 그에게도 20대 청년으로서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을 테다. 이는 Shimmy Twice와 함께 결성한 듀오 그룹 재지팩트의 이름으로써 발매했으며 청춘의 연애 이야기를 풋풋한 가사로써 그려냈던 그의 초창기 앨범 [Lifes Like](2010), 그리고 자신의 24세에서 26세 사이의 인생 이야기를 담았으며 같은 시간대를 보낸(혹은 보내고 있는) 청춘 모두 공감 가능한 정규 1집 [2 4 : 2 6](2012)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빈지노가 손글씨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쓴 앨범 소개.

시간이 흘러 빈지노는 30대 중반이 됐고, 그는 힙합 가수로서 최정점위 위치에 올랐다. 적어도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위치적으로도 나이적으로도 20대의 풋풋한 날것의 심정이나 감정을 CD 안에 담아내기란 어려웠다. 그렇다면 트렌디함이 가장 중요시되는 힙합 음악을 하는 가수로서, 최정점의 위치에 올라서 있는 30대 중반의 랩스타는 청중을 과거와 같이 감동시키기 위해 어떤 음악을 선보여야 할까. 블랙넛과 같이 이에 대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 채 30대 후반이 되도록 정규 1집을 발매하지 못하는 가수도 있다. 산이([Just Rap Shit](2023))나 스윙스([Upgrade V](2024))처럼 20대 시절의 찬란한 모습을 보여주기 어렵다는 사실만 증명한 채 초라하게 무대 센터의 자리를 내준 이들도 있다. 하지만 빈지노는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앨범을 들고 왔다. 한편으로, 이는 최엘비나 이현준, 스카이민혁 같은 이들을 위한 노래이기도 했다. 

 

 

 

BEST TRACK : "침대에서/막걸리"

침대 끝에서/베개는 굳은살이 됐어/이불은 날 억누르고 있어/Evil은 내 머릿속에 있어/빠져드네 또 블랙홀에 목 빠지게 headlock 거네/어떻게 해 나 이거 못 풀겠어 아직도 나 흰 벨트네 (...) 내 to do list는 maximalist/이런저런 게 날 가로막고 있어/몇 주 째 엎치락뒤치락 마치 주짓수/주도권 놓치고 있어/시간과 한강을 등지고 앉아/생각만 하는 난 짝퉁 로댕/조각상처럼 생기지도 않은 오뎅한테/People don't give a s__t/동기부여가 필요해 나는 - '침대에서'
한 병 더 가져와 막걸리 막걸리를/두 병 더 가져와 막걸리 막걸리를/나는 네가 좋아 막걸리 막걸리/한 병 더 가져와 yeah yeah - '막걸리'

 

'침대에서'와 '막걸리'라는 짧은 두 곡을 하나로 합쳐놓은 트랙. '침대에서'에서는 새벽 한두 시 즈음에 할 법할 고민을 몽환적인 비트 위에서 답답하다는 듯이 랩을 뱉다가, '막걸리'에서는 그 이후 답답한 마음에 막걸리를 마신 듯한 빈지노가 서정적인 비트 위에서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랩을 한다. 술 한잔 걸친 뒤 배우자를 보면서 자신의 20대스러운 고민을 모두 잊어버리는 듯한 빈지노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만 같은데, 이는 그가 어째서 '탁월한 스토리텔러'라는 말을 듣는지 이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마도 빈지노가 스테파니와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촬영했을 사진들이 부클렛에 담겨 있다.

BEST TRACK : "여행 Again"

제주도 할미 방언에 서울놈/Feel like foreigner/서울에서 왕왕거리며/쌓인 내 쓰레기 몸 모래로 덮어/내일 모레인 없어 지금을 즐겨

 

'막걸리'의 곡 후반부에서 전화를 걸었던 스테파니와 함께 모든 고민을 잊고 여행을 떠나는 빈지노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한 노래. 가사에 대한 깊은 곱씹음 없이 멜로디만을 즐겨도 절로 즐거워지는 곡이다. 여행 1일 차에 갓 공항 혹은 승강장에서 내렸을 때의 설렘이 그대로 담긴 곡. 평소의 이런저런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던 중 과거에 잡아놓은 여행 일정이 다가와 어쩔 수 없이 가방을 맸지만 불편한 마음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기억이 있다면 특히 와닿을 곡이 아닐까 싶다. 

 

 

 

특이하게도 쥬얼케이스 전면부를 피지컬 앨범 후면으로, 후면부를 전면으로 사용했다.

BEST TRACK : "Trippy"

내 인생 trippy해/돈이 전분 아니지만 머리 속 한 켠에/조명처럼 불 켰네 난 이게 가끔/불편하지만 걍 그러려니 해/그래도 내 인생 뷔페엔 여러 가지가 있네/Mom's spaghetti 스테피의 김치찌개/Friendship can get really twisted/Trying to make that 꽈배기 straight/근데 내 꼰 다리도 제대로 못 피네

 

20대 시절의 빈지노를 괴롭혔을 문제들에 대해 30대 후반이 되어 비로소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인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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