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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아마추어 칼럼

게이머즈의 청춘은 이대로 지나가나?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뭔가에 대해 보고 듣고 느낀 바가 있으면 이에 대해 바로 글로써 표현하는 편이다. 지난 몇 년간은 프로야구가 그 대상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정규시즌 개막은커녕 타 팀과의 연습경기조차 열리지 않고 있다. 자연스레 제2의 취미였던 게임을 많이 소비하게 됐다.

 

책장에 꽂아놓고 플레이하지 않았던 게임에 대한 감상 글, 그리고 사람들이 굳이 패키지 게임을 고집하는 심리나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 인기를 끄는 이유 등에 대한 글을 썼다. 기껏 시간을 들여 글을 썼는데 혼자 간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세게임 마이너 갤러리에도 올렸다. 국내 최대의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 중 하나이니만큼 많은 유저들이 관심을 가져줬고, 다양한 댓글이 달렸다.

 

게시글이 많아지다 보니 비슷한 댓글이 눈에 띄기도 했다. 루리웹으로 가라, 나무위키 정독하냐... 그중 가장 이목을 끌었던 댓글은 '옛날 게임 잡지를 보는 것 같다', '2000년대 초반 잡지 스타일이다' 같은 내용의 댓글이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만큼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해, 여러 개의 유료 잡지를 구독 중이다. 글이 더러웠으면 더러웠지 예전 스타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20년 전 게임 잡지 스타일이라는 댓글이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게임 관련 웹진의 글만 읽어봤지 게임 잡지의 글은 읽어본 적이 없었다.

 

오늘날의 게임 잡지는 어떠한 스타일의 글이 지면에 실리는 것일까? 궁금증이 생겼다. 동시에 예전에 나왔던 게임 잡지와 함께 비교하면 유의미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현재 국내 유일 게임 잡지인 게이머즈의 2002년 6월호와 2020년 4월호를 구했다.

 

 

어떻게 구했나?

역사가 오래된 잡지인만큼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에 잡지의 이름만 검색해도 수많은 판매글이 나온다. 그러나 원하는 잡지를 만족할만한 상태에 구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게이머즈 과월호 판매 글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평소 자주 들리는 레트로 게임 동호회 카페의 장터 게시판은 물론, 중고나라 같은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도 많은 네티즌들이 옛날 게이머즈 잡지를 판매 중이었다. 다만 대부분의 매물은 상태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여러 군데 파손된 책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 몇호인지에 관계없이 평균 시세가 만 원 내외로 형성돼 있었는데, C급 컨디션의 중고 도서를 그 값에 주고 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라딘 같은 중고서점에서도 옛날 게임 잡지 따위는 취급하지 않기에 입수하기 상당히 곤란했다.

 

 

 

그러던 와중에 발견한 곳이 바로 헌책방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이었다. 홈페이지 디자인이 아무리 좋게 쳐줘도 2010년대 초반 수준이라 제대로 운영 중이긴 할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Q&A 게시판에 올해 초까지 문의 답변이 올라온 것을 확인하고 구매하기로 했다. 다음 날(월요일, 4월 13일) 홈페이지에 적혀있던 주소로 전화를 걸어보니 연세가 지긋하실 것 같은 사장님이 전화를 받아 오늘 중에 배송하겠다는 대답을 해줬다.

 

 

 

표지 끄트머리가 살짝 닳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조금의 하자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잡지를 받을 수 있었다. 책의 상태는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예엣날에 나온 헌책을 구하시고 싶다면, 중고나라를 켜기 전에 한 번쯤 헌책방을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온라인 헌책방 쇼핑몰이 조금 걱정스럽다면 오프라인도 좋은 방법이다. 동대문역 8번 출구에서 내리면 곧바로 보이는 청계천 헌책방거리는 좋은 사냥터가 될 것이다.

 

 

아쉬운 점 있었지만, 그럼에도 게이머들의 선택 받았을 2001년호 잡지

표지 바로 다음 페이지에 별도의 광고를 넣는 대신 오는 6월에 창간할 <넷게이머즈>를 홍보하던 모습.

흔히들 2000년대 초반은 게임 잡지의 전성기가 지나간 때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게임 잡지에 대한 게이머들의 수요는 충분히 있었다. 제아무리 온라인의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고퀄리티의 게임 공략본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인벤>, <게임 메카> 등의 게임 전문 웹진은 2000년대 중반이 돼서야 등장했다). 게다가 2000년대 초반은 '리니지', '바람의나라' 같은 온라인 게임들이 잇달아 성공하며 '온라인 게임'이라는 새로운 개척지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넷파워>, <넷게이머즈> 등의 온라인 게임 전문 잡지가 출간되기도 했다.

 

 

 

2001년 당시의 게임보이 어드밴스는 출시된 지 1년은커녕 3개월도 지나지 않은 따끈따끈한 최신 게임기였다.

 

 

우왓! '무려' 통신 시스템 대응!

 

 

드림캐스트와 원더스완의 신작 게임이 소개되고 있는 점에서 20년이라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2001년 6월 기준 게임 관련 최식 소식들을 모아놓은 '헤드라인 뉴스' 코너. 

 

 

사실상 콘솔 게임기 경쟁에서 패배가 확정되며 사내 분위기도 최악까지 치달았던 세가, 플레이스테이션2와 엑스박스를 이길 수 있을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던 닌텐도, 그리고 압도적인 기술력과 자본을 내세워 콘솔 게임기 시장의 신흥 강자로서 난입했던 마이크로소프트... 당시의 게임 시장 판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흥미롭다.

 

 

국내의 게임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사실상 정보를 찾아볼 수 없는 콘솔 게임기 'Indrema L6000'에 대한 소식이 실려 있어 놀랐다. 확실히 당시의 게이머들은 게임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게이머즈>를 필수적으로 구입해야 했을 듯하다.

 

 

2000년대 초반에는 콘솔 게임의 'ㅋ'자도 몰랐던 시기이기에, 게임 소개 글은 적당히 넘어가고 칼럼과 기획 기사가 모여 있는 페이지로 잡지를 넘겼다. 2000년대 초반은 온라인 게임 시장이 커짐과 동시에 기성세대와 언론이 게임의 위험성에 대해 집중 조명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게이머즈> 2001년 6월호에서도 게임이 정말로 폭력을 낳는가의 문제에 대한 칼럼을 찾아볼 수 있었다.

 

 

 

빨간 박스 속의 문단에서만 쉼표가 몇 번 사용됐는지 세어보자.

해당 칼럼을 통해 중세게임 갤러리의 유저들이 어째서 글쓴이의 글을 보며 '옛날 게임 잡지 같다'고 이야기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적당히 끊으면 자연스럽게 읽힐 것임에도 대책 없이 길어지는 문장, 늘어나는 문장과 함께 많아지는 쉼표, 굳이 쓰지 않아도 될 '그리고', '그런데' 등의 표현. 오늘날 '글 잘 쓰는 법' 따위를 찾아보면 책에서나 인터넷에서나 이야기하는 '예쁜 문장 만들기'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문체가 있었다.

 

 

 

괄호 속 느낌표(!), '했다는'체, 말줄임표, <게이머즈>의 존재 여부를 알지조차 궁금한 디렉터를 향한 질문 등... 이 또한 오늘날에는 쓰이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표현들이다.

 

 

'GAME BOY의 타이틀 방어전'이라는 심층 기획 기사의 도입부는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잡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편집자의 독자에 대한 선민의식(?)'이 다소 느껴지기도 했다.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당시의 잡지에서는 가끔씩 자신들 편집자들이 독자의 한 수 위에 서 있다는 마인드가 느껴지곤 했다. 마치 독자들에게 없는 지식을 책으로써 나눠준다는 느낌? '통계를 살펴보고 정신 차려 보는 게 어떨까?'라는 문장에서 이를 살짝쿵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도 <게이머즈> 최신 호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날에는 감히 지면에 실을 엄두도 내지 못할 게임 콘솔 에뮬레이터 소개 기사.

 

 

만 원이 넘는 가격을 지불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런저런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결국은 20년 전 잡지라는 점에서 모두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콘솔 게임 관련 사이트를 돌아도 놓치고 지나칠 정보들을 알기 쉽게 넣어놓고 양질의 기획 기사도 한데 모여있으니, 콘솔 게임 마니아라면 과연 구매하지 않고 배길 수 있었을까? 글쓴이가 2001년에 콘솔 게임 마니아였다면 주저하지 않고 게이머즈를 구매했을 듯하다.

 

 

인터넷 시장 공략 필요해보이는 2020년의 <게이머즈>

 

창간 1주년이 되었다며 뛸 듯이 좋아하던 신생 잡지는 어느덧 국내 유일 게임 잡지로 거듭났다. 

 

 

한가닥 하는 고등학생마냥 도발적이었던 문체는 20년의 세월을 거치며 정중하고 성숙하게 변했다. 에디터의 성향 차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당시에는 굳이 편집부에서 수정하지 않았던 문장을, 이제는 조심스레 검수하고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실제로 1년 전 <게이머즈> 잡지에 실렸던 내용을 읽어보니 유통사 및 게임사와의 관계를 고려하느라 함부로 기사를 쓰지 못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치웠던 대우 재믹스 엔지니어 인터뷰 기사.

그때 그 시절의 <게이머즈>는 없지만, 여전히 양질의 기사들이 실려있는 <게이머즈>였다. 사실 잡지를 주문해 읽기 전까지만 해도 <게이머즈>가 과거만큼의 위용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게임 전문 웹진 대비 컨텐츠의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타 무료 게임 매체를 압도하는 양질의 리뷰글이 알차게 실려 있었다.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게임 잡지일 만했다.

 

 

 

여러 잡지사들이 당장의 수익을 포기하고 최근 발행한 잡지에 실린 기사를 인터넷에 공개한다. 양질의 기사를 읽고 새로 유입될 독자층을 노리기 위해서 말이다.

동시에 <게이머즈>의 마케팅이 너무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본 리뷰글을 작성하며 <게이머즈>와 관련된 여러 정보를 찾아봤지만, <게이머즈>가 공식적으로 운영 중인 곳은 잡지를 구입할 수 있는 '게이머즈몰'과 한 달에 다섯 글 이상 올라오면 다행인 네이버 카페뿐이었다. 뉴미디어 시대에 인스타그램은커녕 트위터나 페이스북 계정조차 없다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다.

 

양질의 기사를 발매 한 달 뒤면 재고 찾기도 어려운 잡지 속에만 꽁꽁 감춰두는 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2013년 9월호부터 공략 기사를 E북화했다고 하지만, 이는 '게임 공략'에만 해당됐다. 다양한 분야의 유료 잡지들이 신규 구독자 확보를 위해 양질의 기획 기사를 무료로 공개하는 시대에, 아무런 홍보도 않는 <게이머즈>는 이상함을 넘어 괴이하게 느껴졌다.

 

 

 

게임과 텍스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오늘부로 <게이머즈>의 애독자가 되었다.

게임 잡지와 관련된 글을 쓰기 위해 여러 게임 커뮤니티에서 관련 키워드로 검색을 하며 여러 게시글을 찾아본 결과, 올해로 스무 살을 맞이한 '청년' <게이머즈>는 많은 게이머로부터 '황혼의 문턱에 선' 잡지 취급을 받는 듯했다. 그러나 그 내용물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두꺼운 종이 뭉치 속에서 신작 게임 소개 코너는 내일 저녁에 남부터미널역에 들릴지 여부를 떠올리게 만들고, 기획 기사는 열정과 퀄리티가 게이머로서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오늘 처음으로 읽게 된 <게이머즈>라는 잡지를 사랑하게 만든다.

 

<게이머즈>와 비슷한 나이인, 게임과 텍스트를 사랑하는 한 명의 게이머로서. 한창때의 청춘을 보내고 있는 <게이머즈>가 워크맨처럼 힘겹게 돌아가다 멈추는 것이 아닌, 그 뒤에야 사람들로부터 '그래도 아름다운 시기가 있었지..'하고 추억되는 것이 아닌. 갓 만들어진 SSD마냥 쌩쌩한 2020년대를 보내며 젊은 게이머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읽는 잡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