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삶의 방식을 '뉴 노멀'이라는 경계로 끌어들였던 2020년의 코로나19 팬데믹은 게이머들의 게임 소비 방식도 바꿔 놓았습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게이머들은 이전보다 게임 스토어에 덜 방문하게 되었고, 게임기에 CD를 집어넣는 대신 하드 드라이브에 게임을 다운로드 받거나 스팀·에픽 게임즈 등의 플랫폼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게이머가 아니던 사람들도 밖에 나가지 못하는 동안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에 모바일 게임을 다운로드 받았습니다.
팬데믹 이전부터 과거의 패키지 게임 시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게임 시장은 소비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다운로드 시장을 향해 본격적인 '드라이브'를 걸었습니다. 플레이 스테이션과 엑스박스의 차세대 모델에는 CD 트레이가 빠지게 되었습니다. PC 혹은 콘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퀄리티의 게임들이 '앱스토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어디서든 콘솔 게임을 즐길 수 있는 UMPC '스팀덱'은 '대 UMPC 시대'를 열었습니다. 심지어는 태블릿PC로 넷플릭스 드라마를 시청하듯 엑스박스 게임을 스트리밍으로써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물론 고성능 UMPC와 클라우드 게이밍 모두 과거에도 존재했지만 메인 스트림에 올라온 것은 2020년대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패키지 게임'만은 점점 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엑스박스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현세대 엑스박스의 패키지 CD는 그 어떤 게임 가게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전세계를 기준으로 봐도 현세대 엑스박스 게임의 CD와 디지털 버전 판매 비율은 1:1 수준이라고 합니다). PS5의 디지털 게임 판매율은 전체 대비 20%로, 엑스박스와 비교하면 낮습니다. 하지만 PS5의 판매량 감소와 스팀의 성장이 겹쳤음을 생각하면 게이머들이 '게임기' 대신 'PC'로 게이밍 디바이스를 옮겼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도 있습니다. 패키지 게임의 콘솔 게임 시장 속 입지가 줄어드는 이유는 다수의 게이머가 더 이상 CD나 게임칩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에 쌍심지를 켜고 꿋꿋이 실물 패키지를 구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만원 더 주고 스팀판 대신 콘솔 패키지판을 구매하며, 실물 패키지가 없다면 굿즈라도 사 모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년 전, 그러니까 패키지 게임 시장이 본격적으로 벼랑을 향해 등 떠밀리기 시작했을 무렵에 이에 대한 생각을 적어본 적이 있습니다. 2020년은 레트로 게임 시장 또한 가성비 에뮬레이터 게임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며 대격변을 맞이한 시기였는데, 에뮬 게임기를 구매하는 대신 꿋꿋이 브라운관 TV에 패미콤의 AV 단자를 꽂으시는 분들께 그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극한의 '패키지 게임 소비자'들에게서 얻은 '패키지 게임을 구매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감성이 중요하다(에뮬레이터or다운로드 게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성이, 게임팩을 꽂고 CD를 트레이에 올려놓는 행동에 존재한다)
2. 게임 패키지를 구매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다(책장이나 수납장에 게임팩을 빽빽이 꽂아놓는 행위 자체에 만족감을 느낀다)
3. 패키지 게임에는 다운로드 게임에 없는 '이데아'가 존재한다
지금 다시 돌아봐도 여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흔히들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말라'라는 충고를 하지만, 사실 이 '기분'이란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애초에 게임은 '기분'이 좋으려고 즐기는 취미 활동입니다). 패키지로써 게임을 즐기던 사람들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자유시간이 되었을 때, 거실 혹은 자신의 방에 있는 게임기 앞에 웅크려 앉을 때의 설렘을 잊지 못합니다. 게임기 전원을 누르고, CD 트레이에 조심스레 게임 CD를 올리고, 게임의 구동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잔잔한 소음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이렇듯 타이틀 스크린에서 게임 시작 버튼을 누르기까지의 모든 과정도 일종의 '게이밍'인 것입니다.
3번(패키지 게임에는 다운로드 게임에 없는 '이데아'가 존재한다)은 최근 발생한 유비소프트의 '더 크루' 싱글레이 논란을 생각하면 다소 의미심장합니다. 스팀 등의 플랫폼에서의 게임 구매는, 엄밀히 따지고 보면 '게임을 구매하여 소장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약관에 따르면 소비자는 게임을 영구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사로부터 비용을 지불하고 라이센스를 획득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유비소프트는 '더 크루'의 서비스를 종료하는 과정에서 디지털로 게임을 구매한 소비자들에게 라이센스를 회수했습니다. <PC게이머>에 따르면 "디지털 소유권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게임사가 라이센스 권리를 직접 빼앗지 않더라도 디지털로 구매한 게임을 즐기지 못하게 될 '최악의 경우의 수'는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내일 당장 스팀이 서비스를 종료한다면, 제가 수 년간 할인 기간마다 구매한 수십 개의 스팀 게임과 이를 즐기기 위해 구매한 스팀덱은 전부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일은 최소한 '내일'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그러나 디지털 게임 붐 이전에 있었던 '클라우드 스토리지 붐'과 '온라인 영화 플랫폼 붐'을 몸소 체험하신 분들이라면, 내가 돈 주고 구매한 저장소나 영화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해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결국 '게임'으로서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실물 패키지로써 발매된 게임 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의견에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단적인 예로 본 포스팅의 내용을 약 2개월 전 게임 커뮤니티 '미니맵'에 게시한 적이 있는데요, 당시 적잖은 분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지만 여러 다른 의견 또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집에 화재가 발생하거나 지진이 나는 등의 불가피한 사건이 벌어지면 실물 패키지와 게임기도 결국에는 망가진다(패키지 게임이라고 해서 영원불변한 것은 아니다)' 같은 의견도 고개를 끄덕이게 됐지만 무엇보다 공감이 됐던 이야기는 바로 '아날로그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아날로그 세대를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라는 댓글이었습니다.
'요즘 세대는 각종 워드 프로세서나 편집툴 프로그램의 저장 버튼으로써 쓰이는 아이콘이 무엇을 모티브로 하는지 모른다'라고 하지요. 당연하게도, 이는 그들이 플로피디스크를 저장 매체로 사용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정말 CD 플레이어나 턴테이블로 음악을 듣는 사람이 없다시피 하니 조금 결이 다를 수도 있겠으나, 비슷한 이유에서 CD나 LP 등을 모으는 사람을 보고 '어차피 스포티파이로 들을 거면서 그건 왜 사 모으는 거야?'라고 질문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제가 위에서 이야기한 '게임을 시작하기까지의 과정'을 추억으로써 간직하지 않고 있는 세대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스팀에서 세일할 때 구매하는 게 훨씬 이득 아니야? PC가 콘솔보다 성능도 월등하잖아. 대체 왜 불편하게 패키지를 구매해서 쓸데없이 돈이랑 공간을 버리는 거지?'
아날로그 시대의 게이밍 경험이 없는 게이머들은 유비소프트의 라이센스 관련 사건 또한 상대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외 게임 매체인 <PC게임앤>에 의하면 약 26조 원 규모의 게임이 한 번도 플레이되지 않은 채 유저들의 라이브러리에 잠들어있다고 합니다. 더는 신작 게임 하나를 큰맘 먹고 CD 뒷면이 마르고 닳도록 돌려가며 플레이하는 시대가 아니게 된 것이죠. 더군다나 오늘날 다수의 게이머들은 최신 콘솔 게임을 구매하는 대신 지속적으로 콘텐츠가 업데이트되는 라이브 서비스 게임에 과금하는 형식으로 게임을 즐깁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라이브 서비스 게임에 '영원'이란 절대 없습니다.
패키지 게임과 다운로드 게임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 중 완벽한 정답은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패키지 게임을 고집스럽게 모으고 있는 저 역시 의자에 앉아 게임을 하게 되면 대부분의 시간을 라이브 서비스 게임에 쏟아붓습니다. 스팀 세일 기간이 되면 쓸데 없이 잔뜩 게임을 사놓고, 그중 대부분의 게임은 막상 플레이 버튼조차 눌러보지 않고요.
그럼에도 동시에 텀블벅에 마음에 드는 게임의 펀딩이 올라오면 실물 패키지 리워드를 선택하며, 스팀으로써 플레이한 게임일지라도 마음에 들었던 게임은 늦게나마 패키지판 또한 구매하게 됩니다. 저는 그것이 '게임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더 이상 CD 케이스를 꽂을 공간이 남지 않을 때까지 이러한 게이밍 습관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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