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년은 대한민국 게임 업계에 있어 기념비적인 시기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리니지M’과 리니지2M’의 대성공을 지켜보던 게임사들이 너도나도 ‘리니지라이크’라는 장르로 일컬어지는 모바일 MMORPG의 개발에 나섰고, 대부분의 게임이 상업적인 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룩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2021년과 2022년에는 넷마블과 카카오게임즈, 넥슨이 ‘제2의 나라: Cross Worlds’와 ‘오딘: 발할라 라이징’, ‘히트2’로 보란 듯이 성공을 거두며 게이머 사이에서의 커다란 파장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젊은 게이머들에게 전혀 어필되지 못한 ‘리니지라이크’류 게임의 게임성이나 그런 게임에 거리낌 없이 지갑을 여는 중·장년 게이머에 대한 조롱도 있었다. NC 소프트(이하 NC)는 시대착오적 게임을 만든는 이유로 1020 게이머가 주축인 커뮤니티에서 ‘개고기 개발사’라는 멸칭까지 얻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왜’라는 질문은 빠져 있었다. 정작 NC가 자동사냥까지 과감히 빼고 출시한 ‘쓰론 앤 리버티(2023)’는 일말의 흥행 없이 외면받은 이유, 타 게임사 역시 이미지 훼손을 감수하고 ‘리니지라이크’를 제작할지언정 PC MMORPG는 만들지 않은 이유, 그리고 정작 젊은 게이머들도 풀 오토 모바일 게임에 매몰되기 시작한 이유 같은 것들 말이다.
#. 2018년 이후 자취 감춘 ‘MMORPG 빅3’, 3년 만에 모바일로
2021년 초에 언론으로부터 모바일 MMORPG 빅3로 기대받았던 게임은 ‘트릭스터M’과 ‘제2의나라’, ‘그리고 ‘오딘 : 발할라 라이징’이었다. 이들은 출시 직후 상업적인 면에서 나란히 흥행했다. ‘트릭스터M’이 2년 만에 서비스를 종료한 점이나 ‘제2의나라’가 현재 매출 순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단기적인 성과일 뿐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성과마저도 2010년대 초반의 기대작이었던 ‘테라(2011)’와 ‘블레이드 앤 소울(2012)’, 그리고 ‘아키에이지(2013)’ 이후 약 10년 만에 있는 일이었다. 즉, 한국에서 MMORPG라는 장르는 ‘리니지라이크’가 구원 투수로 등장하기 전까지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꼼짝없이 암흑기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테라’, ‘블레이드 앤 소울’, ‘아키에이지’의 넥스트로 주목받았던 게임들을 살펴보자. 2010년대 중반에는 ‘블레스(2016)’와 ‘검은사막(2014)’, ‘이카루스(2014)’가 큰 기대를 받았으나 ‘검은사막’을 제외한 두 게임은 저조한 실적을 거뒀다. ‘블레스’는 서비스 오픈 당시 한국 게임 업계 역사상 가장 많은 개발비를 투자하고 한스 짐머가 OST 제작에 참여해 관심을 끌었으나, 오픈 이후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서비스를 종료했다. ‘블레스’에는 못 미치지만 마찬가지로 수백억 원의 개발비를 투입했으며 10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문을 열었던 ‘이카루스’도 오픈 전의 기대치에 걸맞은 흥행을 올리지는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넥슨에서 MMORPG 3개(‘메이플스토리2(2015)’, ‘수신학원 아르피엘(2015)’, ‘트리 오브 세이비어(2016)’)의 라이브 서비스를 예고했다. 국민 RPG ‘메이플스토리(2003)’의 정통 후속작으로 기대를 끌었던 ‘메이플스토리2’는 잦은 사건 사고와 운영 미숙 끝에 호흡기만 붙어있는 상황이다. ‘라그나로크 온라인(2001)’의 정신적 계승작 취급을 받은 ‘트리 오브 세이비어’는 오픈 초기에 무수한 버그가 터지며 매우 나쁜 첫인상을 남겼고, 끝끝내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추억의 게임 ‘마법학교 아르피아(2007)’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수신학원 아르피엘은 별다른 추억조차 남기지 못한 채 3년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이들은 오픈 전부터 어느 정도의 호의적인 팬층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블레스’, ‘이카루스’의 실패보다 더욱 뼈아프게 다가왔다.
2010년대 후반 들어서는 쿼터뷰 MMORPG라는 공통점을 가진 ‘리니지 이터널’과 ‘로스트아크(2018)’, ‘뮤 레전드(2017)’가 새로운 빅3로 주목받았다. ‘리니지 이터널’은 5년이 넘는 개발 기간 끝에 프로젝트 자체가 엎어졌다가 2023년이 되어서야 ‘쓰론 앤 리버티’라는 이름도 게임성도 전혀 다른 결과물로써 세상에 나왔다. ‘뮤 레전드’는 아무런 반향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2018년에 서비스를 시작한 ‘로스트아크’만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에는 MMORPG 빅3라는 용어 자체가 자취를 감췄다. 2020년대 들어 출시된 국산 MMORPG 중 거의 유일한 PC 게임이라 할 수 있는 ‘ELYON(2020)’은 ‘반짝’조차 하지 못하고 잊혀진 끝에 문을 닫았다.
그렇기에 2021년 MMORPG 빅3의 대성공은 큰 의의를 가졌다. 첫날부터 70억 매출 잭팟을 터뜨리더니 서비스 오픈 직후 열흘간 누적 매출액만 200억 원을 훌쩍 뛰어넘으며, 평균 일 매출액 10억 원을 달성하던 모습은 그야말로 경악할 만한 소식인 것이었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황무지나 다름없어진 국산 MMORPG의 구원자가 ‘모바일 플랫폼’으로써 ‘리니지라이크’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에, 더욱 많은 점을 시사했다.
#. ‘자동사냥 MMORPG’, PC 시장을 지배하다
물론 ‘리니지라이크’가 국산 MMORPG의 트랜드를 지배하기 이전부터 게임 업계에서는 활발하게 ‘자동사냥’ 버튼이 달려있는 모바일 MMORPG를 개발해 왔다. 넥슨에서는 자사의 간판 게임인 ‘메이플스토리’를 높은 수준으로 재현한 ‘메이플스토리M(2016)’와 함께 ‘AxE(2017)’, ‘트라하(2019)’ 등의 게임을 런칭했다. 넷마블은 NC가 모바일 게임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에 IP 계약을 맺고 ‘리니지 2: 레볼루션(2016)’을 출시함으로써 흥행몰이를 했다.
다만 ‘리니지라이크’ 게임들은 PC 클라이언트 또한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졌다. 대표적인 사례로 ‘메이플스토리M’와 ‘리니지 2: 레볼루션’은 각각 2022년 12월과 2024년 5월이 돼서야 PC 클라이언트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PC 버전의 ‘메이플스토리’와 ‘리니지 2’와 차별화된 게임으로써 모바일 서비스에만 집중했다는 의미다. 반면 ‘리니지2M(2019)’은 처음부터 모바일-PC 크로스플랫폼으로써 출시됐다(이후 NC는 ‘리니지M(2017)’의 PC 클라이언트 또한 공식적으로 지원함은 물론, 자사의 모든 모바일 게임을 크로스 플랫폼으로 개발했다). ‘제2의나라: Cross Words’, ‘오딘: 발할라 라이징’, ‘히트2’도 모두 PC 클라이언트를 공식적으로 지원했다. ‘자동사냥’ 버튼이 모바일 환경에서 조작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 PC 게임의 영역까지 침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MMORPG에 ‘자동사냥’ 버튼이 붙고 안 붙고의 차이는 무엇일까? 파밍 단계에서의 피로성이 극도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MMORPG는 유저들을 붙들기 위해 일일 퀘스트 등의 컨텐츠로써 매일 최소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모니터 앞에 앉아있게 강제한다. 만약 유저가 캐릭터의 레벨을 높이기 위해 추가적으로 필드 사냥을 하거나 좋은 장비를 맞추기 위해 일·주간 던전에 간다면 이 시간은 더욱 길어질 것이다. 모바일 MMORPG는 이 과정을 수동으로 하는 데 애로사항이 생긴다. 컴퓨터 모니터에 비해 훨씬 작으며 게임 패드나 키보드에 비해 훨씬 조작이 어려운 터치스크린이, 같은 시간을 투자하더라도 훨씬 큰 피로를 유발한다. 그래서 스마트폰 보급 초창기인 2010년대 초·중반에도 모바일 MMORPG에는 ‘자동사냥’ 버튼이 붙어 있었다.
2020년대 들어 대부분의 국산 MMORPG가 ‘리니지라이크’ 포멧을 차용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리니지라이크’의 가장 큰 특징은 수동 조작을 극단적으로 간소화했다는 것이다. ‘리니지라이크’의 시초인 ‘리니지(1998)’ 자체가 마우스 클릭과 몇 가지 단축키만으로 전투와 포션 및 스킬을 사용하는 게 조작의 전부였는데, 명목상 모바일 플랫폼이 주력인 2020년대의 ‘리니지라이크’ 게임들은 이마저도 ‘자동사냥’ 버튼으로써 없애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리니지라이크’의 주력 컨텐츠는 혈맹원(혹은 길드원)끼리 뭉쳐 캐릭터 스펙의 우열을 가림으로써 필드 위 이권을 사수하는 ‘쟁’이지, 몇 시간 동안 정신없이 다양한 패턴의 공격을 피하고 스킬을 사용해야 하는 ‘보스 레이드’가 아니다. 즉 ‘리니지라이크’는 캐릭터가 어느 장소에서 전투할 것인지 지정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그 어떤 수동 조작도 필요하지 않다. 과금 피로도를 느낄지언정 조작의 피로는 전무한 셈이다.
‘자동사냥’ 버튼은 2010년대 초·중반의 모바일 MMORPG에도 존재했지만, 당시 PC 게이머들에게 흉물 취급을 받았으며 이 버튼이 달려있는 PC MMORPG는 빈말로도 게임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러니 ‘리니지2M’, ‘오딘: 발할라 라이징’ 같은 ‘리니지라이크’에 대한 시선이 매우 나쁜 것은 당연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류의 MMORPG에 익숙한 유저들에게 있어 레이드란 해당 장르의 재미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인데, ‘리니지라이크’는 사실상 레이드를 없애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럼에도 지난 몇 년간 ‘리니지라이크’는 한국 MMORPG 업계를 주름잡으며 깜짝 놀랄 만큼 확실한 흥행 보증 수표로서 작용했다. 그리고 기어이 휴대전화를 넘어 기어이 PC 플랫폼에도 자리 잡았다. 꾸준히 수요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퇴근 후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장시간 키보드를 두드릴 자신이 없는 MMORPG 유저들에 의한 수요가.
#. 그들은 게임할 시간이 없다.
2024년 4월 24일 문화체육관광부가 공개한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의 하루 평균 여가시간은 3.6시간이었으며 휴일 평균 여가시간은 5.5시간이었다. 이 둘을 합한 일평균 여가시간은 4.1시간으로, 4.4시간이었던 2021년과 비교해 0.3시간가량 낮아진 수준이다(2022년은 4.2시간). 12년 전 OECD 평균 여가시간이 다섯 시간이었는데, 당시를 기준으로 비교해도 오늘날의 한국인은 1시간가량 적은 휴식 시간을 갖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리니지라이크’ 및 MMORPG의 주 소비층인 30·40대의 일평균 여가시간은 3.8시간으로 전 국민 평균보다 낮았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그들은 게임할 시간이 없다. 라면 더욱 더 말이다.
4시간에 살짝 못 미치는 여가 시간 동안 게임을 플레이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퇴근 후 훨씬 더 기진맥진하게 되는 한국의 노동 강도를 고려하지 않은 생각이다. 2023년 7월 16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일-생활 균형시간 보장의 유형화’에 따르면, 한국의 2021년 적정 근로시간 보장 수준은 1점 만점 중 0.11점으로 OECD 31개국 중 29위였다. 연간 근로시간은 2023년 기준 1874시간으로 OECD 평균보다 130시간이나 많은 압도적 1위였으며, 2위 미국보다 64시간 길었다. 다시 말해, 한국인은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오래 일함에도 불구하고 평균보다 낮은 수준의 여가 시간을 보장받고 있는 셈이다.
위에서 설명한 문제들은 비단 30·40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루 종일 일한 뒤 적은 여가 시간이 주어진 한국인의 모습은, 시간을 갈아넣는 컨텐츠가 핵심인 MMORPG가 국내에서 10년 넘게 힘 쓰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짐작하게 해준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리니지’, ‘바람의나라’ 등으로써 PC 온라인 게임에 입문했던 이들은 예전과 같이 게임에 시간을 쏟아부을 시간도 기력도 없어, 집에 돌아와서도 ‘리니지라이크’의 PC 클라이언트를 실행하고 자동사냥을 돌리는 것이다. ‘린저씨’들과 달리 어려서부터 MMORPG를 즐긴 경험이 없는 10·20대는 자연스레 방치형 모바일 게임의 다운로드 버튼을 누르게 되는 것이다.
#. MMORPG 시대의 영광 되찾으려면 주4일제 도입해야
AAA급 게임이 나와도 게이머들은 그 게임을 즐길 여유가 없다. 그러니 자꾸만 휴대전화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시간적이고 육체적인 여유가 있었더라면 건드리지도 않았을 자동사냥 모바일 게임을 설치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게임 할 시간을 주는 것이 하나의 해답 아닐까?
2004년, 근로기준법이 개정됨에 따라 법정 노동시간이 주당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축소되었다. 그로부터 14년 후인 2018년에는 최대 노동시간이 주당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어들었다. 무수한 반대를 뚫고 입법 처리해 노동시간을 단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이야기했듯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지구에서 손꼽히게 긴 시간을 일하는 데 쏟아붓고 있다. 너무 오래 일하는 나머지 게임은커녕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을 생각조차 꿈도 못 꿀 정도다(2024년 대한민국 합계 출생률 0.68명).
70%에 달하는 직장인들이 지금보다 근로시간을 줄이는 것에 찬성한다. 박홍배 의원이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1일부터 9일까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전체의 63.2%가 주4일제의 법제화에 동의한다고 응답했다. 연차휴가 확대와 주간 연장근로 한도 하향 또한 각각 74.3%와 66.6%가 동의했다. 실제로 주4일제를 시행하는 기업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SK그룹과 카카오게임즈는 각각 2019년, 2021년 4월부터 격주로 주4일제를 실시했으며, 경기도는 내년부터 ‘임금 삭감 없는 주4.5일제’를 시범 도입할 예정이다.
지난 몇 년간 너무나도 많은 국산 모바일 게임들이 게이머들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그러나 게임사는 철저히 게이머의 수요에 따라 게임을 제작했을 뿐이었으며, MMORPG가 자취를 감추고 풀 오토 모바일 게임이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지배하게 된 배경에는 살인적인 노동 풍토가 있었다. MMORPG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기 위해, 더 나아가 양질의 게임이 더 많이 한국 게임업계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노동 강도의 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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