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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책

무진기행 외 9편 (김승옥)

 

 

   김승옥은 1960년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소설들은 6·25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상황에서 급진적인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과도기의 대한민국을, 당시의 서울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도시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승옥의 소설에는 가식이 없다. 김승옥의 소설 속 주인공은 그저 주된 서술자일 뿐, 작품 속 ‘주인공’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우리와 같이 소시민으로서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갈 뿐이다. 불가항력의 시련 앞에서 좌절하고 권력에는 굴복하는 유약한 인물이다. 그럼으로써 김승옥의 소설은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보다 사실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김승옥 특유의 만연하는 듯한 문체는 그가 말하고 싶은 바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 누구도 주변인에게 관심 가지지 않는 차가운 도시, 누군가의 아들이었던 간첩이 죽었지만 평소와 같이 하루가 흘러가는 시골 마을을 사진과 같이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우연히 시선을 던졌지만 잠시 뒷면 잊어버리고 지나가게 될 사소한 것에도 포커스를 맞춘다. 이는 그의 소설이 6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으로 존재하게 만들어준다.

 

우리는 갑자기 목적지를 잊은 사람들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갔다. 전봇대에 붙은 약 광고판 속에서는 이쁜 여자가 춥지만 할 수 있느냐는 듯한 쓸쓸한 미소를 띠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어떤 빌딩의 옥상에서는 소주 광고의 네온사인이 열심히 명멸하고 있었고, 소주 광고 곁에서는 약 광고의 네온사인이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는 듯이 황급히 꺼졌다간 다시 켜져서 오랫동안 빛나고 있었고, 이젠 완전히 얼어붙은 길 위에는 거지가 돌덩이처럼 여기저기 엎드려 있었고, 그 돌덩이 앞을 사람들은 힘껏 웅크리고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후략)

 

   ‘서울 1964년 겨울’은 김승옥의 문학적 강점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작품이다. 1964년의 겨울을 서울에서 보내고 있는 25살의 구청 병사계 직원인 ‘나’와 부잣집 장남 대학원생 ‘안’은 분명 쓸쓸함을 느껴 선술집에서 우연히 마주쳤음에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들의 우정이라고도 부를 수 없을 관계는 그날 밤이 지나고 나면 유리창에 낀 서리가 라지에이터 열에 녹아내리듯 스그머니 사라지게 될 정도의 유대감에 불과하다. 둘의 사이에 낀 ‘사내’는 급성 뇌막염으로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고 괴로워하고 있는 안타까운 소시민이나, ‘나’와 ‘안’에게는 그저 즐거운 시간을 ‘일을 좀 이상하게 돌아가게 만든’ 불청객에 불과하다. 결국 ‘사내’는 그날 밤 ‘나’와 ‘안’을 통해서도 자신의 마음을 위로받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만, 어쩌면 그들과 어울려 다니며 아내의 몸값을 탕진해버린 것만으로도 구원받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내’보다 더욱 혹독한 처지에 놓인 ‘얼어붙은 길 위 거지들’은 일말의 동정도 받지 못한 채, 그저 발에 채이는 돌덩이와 같은 취급을 받으니 말이다. 60년대를 직접 살아본 적이 없어 그가 시대상을 잘 살렸는지에 대한 고증 여부를 운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승옥이 바라보는 1964년 겨울의 서울은 그러했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해 그 계절의 서울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니 2020년대를 살아갈 청소년들의 국어 교재에도 실리는 것일 테고 이제는 갓난아기로서도 90년대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어린아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는 것일 테다.

 

   김승옥의 소설은 현실적이다. 김승옥의 소설에는 가식이 없다. 그렇기에 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 김승옥의 소설은, 60년이 지난 오늘날 읽기엔 역겹다. 그의 소설은 마치 60년대의 온갖 구역질 나는 오물을 한 데 긁어모으고 이를 훌륭히 플레이팅함으로써 예술로 승화시킨 것고도 같다. 그로부터 반 세기도 넘게 지나버린 오늘날 우리는 김승옥의 작품에서 그가 의도한 것보다 더욱 끔찍한 것들을, 이제는 완전히 부패해버려 쓰레기로서 처치하기에도 곤란한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60년대의 대한민국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따위의 것들 말이다. 문학평론가인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의 해설에 따르면 김승옥의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부끄럽고 여자들은 더럽다. 명망 있는 음악대학을 나왔으나 시골 학교의 음악 교사로 전락해 상경을 꿈꾸는 ‘하인숙’은 도시 남자에게 성을 제공해가면서까지 촌동네를 떠나려 한다(무진기행).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는 ‘어머니’는 밤이면 밤마다 남편을 닮은 사내들을 집에 들여, 새파란 자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외간 남자와 잠자리를 갖는다(생명연습).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위해 같은 은행에서 일하는 남편과 모른 체 하는 일상을 지겨워하는 ‘현주’는, 어느 날 무뢰한에게 강간당한 경험에서 짜릿함을 느낀 이후로 매일 그와 같은 사내가 자신을 범해주길 원하며 밤거리를 떠돈다(야행). 그의 작품 속 여성의 음부가 더럽고 불결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가 부패했음을 드러내는 방식은 갈수록 첨예하게 드러난다.

   말하고 싶은 바는, 과연 김승옥이 음부의 더러움을 통해 자본주의의 부패성을 드러내려 했다는 해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하냐는 것이다. ‘서울의 달빛 0장’에서 아내가 성을 팔았다는 것에 분개한 ‘나’는 이혼 직전 말다툼을 하던 도중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악귀 붙은 년, 악귀붙어 미친년. 네 주둥아리를 빌려서 아는 체 떠들고 있는 도깨비는 어떤 놈이냐? 방송국의 유치한 대사로만 꽉 들어찬 네 대가리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중략) 그래 우습게 보고 있었다. 그런 줄 알고, 네 몸이 미친놈 도깨비가 붙은 줄 알아보고 우습게 보고 있었다. 누구냐? 네 입을 빌려서 떠들고 있는 놈. 그ᄄᆞ위 말로 널 유혹했단 말이지? 그따위 말로 내 자리를 빼앗았단 말이지? 여자의 자물쇠는 그따위 말로 열린단 말이지? 열리자마자 문 안으로 정액을 쏟아 넣어 그 말을 네 자궁 속에 단단히 풀칠해 놓았단 말이지? 우린 이제 모두 죽게 될 테니까 하며 슬픈 얼굴을 짓고 사내들이 다가오면 네 문은 스스로 열린단 말이지? 누구냐? 이름을 대란 말야. 네 주둥아리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그놈. 아직도 네 자궁 속에 살아서 까불어 대고 있는 놈. 개 같은 욕망의 시대의 구실을 붙여 널 유혹한 놈. 이름을 대. 모두 이름을 대. 몇 놈이야? 모두 이름을 대. (중략) 그래, 미쳤는지도 모른다. 네 자궁 속에 붙어서 아무한테나 문을 열어 주는 도깨비한테 물려서 나도 미친 모양이다. 어서 이름만 대. 악귀는 제 이름을 부르면 도망치는 거다. 널 쫓아내고 싶어서가 아니다. 네 몸속의 도깨비를 쪼차내고 싶어서다. 왜 감추느냐, 왜 도깨비를 감싸고 내놓지 않느냐. 부끄러워서냐. 작은 부끄러움을 지키려고 큰 사랑을 거절하는 거냐. 널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는 건 네 몸에 붙은 도깨비야. 도깨비가 지배하고 있는 널 내가 어떻게 믿고 사랑할 수 있느냐. 토해 버러라. 도깨비를 토해 버려, 네 자궁 속의 도깨비를 입으로 토해 버려. 널 사랑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나’의 아내는 생계를 위해 방송업계에 뛰어든 이후 성을 팔기 시작했고, 결국은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인물이다. 한편 ‘나’는 아내와 이혼하기 이전에도 친구와 함께 호스트바 따위의 유흥업소에 다녔고, 결혼하기 전에는 생계적으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음에도 매춘부와 성행위를 하다 성병에 걸린 이력이 있다. 물론 친구와 함께 호스트바에 갔다가 호스티스로 등장한 아내와 마주쳤을 때 ‘나’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과연 ‘나’는 자신의 아내에게 네 자궁에 도깨비가 들었다면서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아내보다 더럽지 않은 사람인지 의문스럽다.

   김승옥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더럽다면, 그의 소설 속 남성들은 집게가 없음 집을 수 없는 수준이다. 서울에 함께 올라가는 조건으로 하룻밤을 보냈으면서 무책임하게 홀로 무진을 떠나는 ‘나’(무진기행), 사랑하는 연인을 강간함으로써 그녀를 떠날 명분을 마련한 ‘한 교수’(생명연습), 동네 처녀를 강간하려는 형과 그런 형을 군말 없이 돕는 ‘나’(건), 누나를 강간한 ‘그놈’과 그런 남성에게 일자리를 소개받은 누나에게 역겨움을 느끼는 ‘나’(염소는 힘이 세다….

   김승옥의 소설은 분명 오늘날까지도 1960년대 한국 문학사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많은 이들에게 연구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산해진미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입맛에 안 맞는 음식에 불과하지 않는가. 본고는 아무런 학술적 가치도 갖지 않는 일개 개인의 독후감일 뿐이다. 그러니 한 시대를 풍미한 소설가의 역작에 대해 이렇게 취향을 핑계로 혹평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