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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책

롤리타 (1955) : 험버트 험버트처럼, 우리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게

(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주간 시사잡지 <시사IN>에 실린 헌책방 사장님의 글 〈롤리타〉가 아니라 〈로리타〉를 읽고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독특한(혹은 민감한) 소재를 천연덕스럽게 다루는 소설이라는 점에서도 끌렸다. 페도필리아를 지칭하는 로리타 콤플렉스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은, 한 권의 소설책이 그만큼 세계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는 뜻 아닌가. 그러니 딱히 <롤리타>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커다란 기대를 품고 독서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막상 독서를 시작하고 나서는 작가의 미려한 문체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가 '롤리타'를 비롯한 어린 여자아이들을 '님프'라고 부르며 자신의 쾌락을 충족하기 위해 탐미하듯이, 나 역시 작품 속에서 '험버트 험버트'가 자신의 소아성애적 성벽을 아름답게 포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미사여구를 탐미했다.

 

  발레리아는 아주 천진난만하고 명랑해 보였고, 소녀처럼 꾸미고, 미끈한 다리를 시원스레 드러냈고, 맨발에 검은 벨벳 슬리퍼를 신으면 하얀 발등이 돋보인다는 사실도 알았고, 입술을 삐죽거리거나 보조개를 짓거나 폴짝폴짝 뛰어다녔고, 던들을 즐겨 입었고, 곱슬곱슬한 금발을 찰랑찰랑 흔드는 모습은 한없이 진부하면서도 한없이 귀여웠다.

  옛날 그 아이와 똑같았다. 꿀빛으로 물든 가녀린 어깨도, 맨살을 드러낸 매끄럽고 유연한 등도, 밤색 머리카락도 모두 똑같았다. 비록 물방울무늬가 찍힌 검은색 스카프를 둘러 가슴을 가렸지만, 늙어가는 유인원 같은 내 육체의 눈은 몰라도, 어린 시절 추억의 시선은 영원히 잊지 못할 그날 내가 어루만졌던 그 풋가슴을 단숨에 꿰뚫어보았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 수록 작가의 수려한 문장력에 감탄하기보다는 '험버트 험버트'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더욱 커지게 된다. 그는 온갖 아름다운 말로써 자신의 '님프'에 대한, 롤리타에 대한 사랑을 어필한다. 자신은 무해한 중년의 남성이며, 마치 발칙한 어린 요정들에게 유혹당한 것마냥 스스로를 조명한다. 하지만 실상 그는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하기 위해 매춘을 마다하지 않았고, '롤리타'의 몸을 사랑하면서도 그녀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그저 어린 시절 첫사랑의 이미지를 어린 소녀들에게 투영함으로써 그 모습 그대로 소유하기를 욕망할 뿐인 페도필리아다.

  무작정 성적 매력을 지닌 어린 여자아이를 사랑하기보다는 일찍이 유년기의 연인 '애너벨'과 닮은 이를 찾아다닌다는 점에서 소아성애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가질 수 있지만, 애처로운(?) 추억을 가졌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정당화 되는가 안 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 아깝다.

 

  내 우묵한 손바닥에는 아직도 롤리타의 그 상아 같은 감촉 - 옴폭하게 들어간 사춘기 이전의 등허리 곡선, 그리고 내가 그녀를 부둥켜안고 아래위로 쓰다듬을 때 얇은 원피스 너머로 만져지던 상아처럼 매끄럽고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살결의 느낌 - 이 생생하기만 하다. 나는 그녀의 어수선한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서 벽장문을 열어젖히고 그녀의 몸이 닿았던 구겨진 옷 무더기로 뛰어들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구멍이 뚫린 아주 얄팍한 천 조각이었는데, 솔기 사이에 시큼한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나는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험버트의 심장부에 그것을 휘감았다. 내 안에 격렬한 혼란이 끓어올랐다.

  상아처럼 창백한 다리와 백합처럼 하얀 목이 롤리타와는 대조적이었는데, 가무잡잡하고 발그레하고 뜨겁고 더럽혀진 롤리타를 향한 나의 욕망에 화답하는 (내 척추를 따라 흐르는) 즐거운 송가 같아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그때 창백한 아이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정말 자연스럽고 따뜻한 시선이었는데도) 우스꽝스러울 만큼 수줍어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손등을 뺨에 대고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고 하면서 쩔쩔매더니 결국 앙상한 어깨를 내 쪽으로 돌리고 어깨뼈를 들썩거리면서 암소처럼 생긴 엄마와 잡담을 나누는 체했다.

 

  특정 사건으로써 '험버트 험버트'를 옥죄고 있던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사슬은 끊어지고, 그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하기 위한 행위는 분명히 파멸을 향해 치닫아가며, 독자는 과연 '험버트 험버트'가 어떠한 방식으로 몰락할 것이며 어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인지를 기대하면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롤리타>는 '험버트 험버트'가 어떠한 범죄를 저지르고 재판장에 서기 전 감옥에서 작성한 수기라는 컨셉의 소설이다).

  하지만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치 주인공이 처음 롤리타와 마주쳤을 때 느꼈을 장엄한 쾌감과 같은 카타르시스가 아니다. 또다른 험버트 험버트와 물기를 잃고 말라 비틀어진 스펀지처럼 건조하게 변해버린 문체, 그리고 읽는 이에 따라서는 다소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결말이다. 로맨스로 둔갑하고 있었던 범죄·스릴러 소설은 종반에 이르러 마치 느와르로 장르 변화를 이루는 듯한데, 실은 이 또한 속임수일 뿐이다. 하드 커버 속에 들어있던 것은 희극의 탈을 쓴 비극, 혹은 부조리극이다.

 

  하얀 모직 스카프에 포근히 싸여 상자 속에 보관된 그것은 소형 자동권총이었다. 32구경, 8연발 탄창, 길이는 롤리타 키의 9분의 1이 조금 못 되고, 손잡이는 호두나무에 격자무늬를 새겨 진청색으로 마무리했다. 이 권총은 고인이 된 해럴드 헤이즈의 유품인데, 내가 이것과 함께 물려받은 1938년 카탈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유쾌한 설명도 있었다. "휴대하기에 편할뿐더러 가정이나 차 안에서 사용하기에도 편리하도록 특별히 공들여 제작한 제품이다." 나도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언제든지 쏴버릴 수 있도록 실탄을 장전하고 공이치기를 끝까지 당겨놓았지만 우발적으로 발사되는 일이 없도록 안전장치를 걸어두었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학파에게 권총이란 원형적 아버지의 가운뎃다리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권총 손잡이에 탄창을 장착한다. 탄창이 제자리에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거나 감촉이 느껴질 때까지 밀어넣는다. 딱 맞아떨어지는 상쾌한 느낌. 실탄은 여덟 발. 청색 도금. 발사 순간을 학수고대하는 듯하다.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독자는 기어이 작가의 말까지 읽어보게 된다. 그리고 아무런 의도 없이 손이 가는 대로 썼다는 작가의 고백에, 자신이 500 페이지에 달하는 문자를 읽는 내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게 <롤리타>라는 장편소설로써 놀아났음을 깨닫게 된다. 내가 그랬다...

  그래서 불쾌함이 남기보다는 어째서 소아성애라는 민감한(사실 민감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그것도 1950년대에 발표된 소아성애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임에도 걸작이라는 평과 함께 5000만 부가 넘게 팔릴 수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전에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 <야행> 같은 작품을 읽을 때는 그것이 분명 196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명작이며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빼어난 문장력을 자랑함에도 불쾌함을 느꼈는데, <롤리타>를 읽으면서는 (중반부에서는 다소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그러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