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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소프트웨어

트릭스터M : 소년이여 린저씨가 되어라

서버 오픈 첫날 트릭스터M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게임을 시작했던 수많은 게이머들.

  'NC 소프트가 리니지가 아닌 다른 게임을 만든다.' 고착화된 모바일 게임 시장에 지쳐 있었던 한국 게이머들을 설레게 만들었던 문장이다. 지난 몇 년간 모바일 게임을 제작하는 회사들은 어줍잖게 무·소과금 유저를 챙기는 것보다 극소수의 핵과금 유저를 바라보는 게 훨씬 큰 이익이 됨을 깨달았다. 특히 모바일 RPG는 수천만 원 이상의 금액을 투자하는 게이머가 가상 현실 속에서 전능감을 느끼는 장르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트랜드를 이끌었던 기업이 바로 NC 소프트였다. NC는 자사가 자랑하는 첨단 기술로 '린저씨'라고 불리는 이들을 위한 게임만을 만들었다. '린저씨'만을 위한 모바일 게임으로 최상위 매출을 올림으로써, 라이트 게이머들을 위한 게임을 만들 필요가 없음을 증명했다. 그랬던 그들이, 드디어 '리니지가 아닌 다른 게임'을 제작하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게임 출시일은 차일피일 미뤄졌으나 트릭스터M에 대한 게이머들의 기대감은 시들기는커녕 더욱 불타올랐다. 과거 CRT 모니터 앞에 앉아 트릭스터를 즐겼던 추억을 간직한 이들은, 옛사랑과의 7년 만의 재회를. 트릭스터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들은, 핸드폰으로써 새로이 써 내려가게 될 RPG 게임에서의 행복한 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게임이 출시되었던 지난 5월 24일에는 사전에 캐릭터를 생성했던 유저가 아니면 서버에 접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 NC가 서버 관리를 너무 안일하게 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서버 구축이 미흡했다고 해도, 트릭스터M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낮았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오랜 기다림 끝에 게이머들 앞에 베일을 벗고 나타난 결과물은 '이름만 다른' 리니지, '귀여운' 리니지, 아니 그냥 리니지였다.

  어떤 게이머들은 데이터를 모두 다운로드받고 게임을 실행하자 자신을 반긴 리니지M 식 UI에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미련이 있었던 게이머들은 트릭스터M을 기다려왔던 시간이 아까웠는지, 직접 플레이해보기 전까지는 속단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휴대전화를 고쳐잡았다. 그중 대다수는 리니지M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게임성에 눈물을 흘리며 게임을 삭제했다. 그렇게 걸러지고 걸러진 끝에 남은 유저들은, 글쎄, 나 자신도 그 나머지 그룹에 포함되지 못했기 때문에 왜 아직까지 트릭스터M을 붙들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정도 게임을 플레이해본 끝에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는 있었다.

 

  어렸을 적에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던 32세 직장인 김준봉 씨는 신작 모바일 게임 트릭스터M을 다운로드받았다. 평소 리니지류 게임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지만, 트릭스터M은 아기자기한 그래픽과 일러스트에 흥미가 생겼다.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오후 8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김준봉 씨에게는 게임을 즐길 시간이 없었다. 시간적 여유가 부족할뿐더러 평일 저녁에는 취미 생활을 즐길 체력도 받쳐주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모든 조작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트릭스터M은 이러한 제약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출퇴근 시간에는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채 한 손으로 휴대폰을 잡고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면 됐다. 업무시간에도 자동사냥을 돌려놓은 채 눈앞의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기진맥진해서 퇴근하고 나서는 PC로 NC 소프트의 모바일 게임을 구동하게 해주는 플랫폼 <퍼플>로 트릭스터M을 실행한 채, 유튜브를 시청하며 늦은 저녁을 먹었다.
  레벨 25 즈음이 되니 게임 진행에 어려움이 생겼다. 퀘스트와 필드 드랍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장비로는 도저히 동레벨대의 몬스터를 잡을 수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19000원에 판매 중인 직업별 스타터 패키지를 구매하면 한결 나아진다는 정보가 나왔다. 직장인 김준봉 씨에게 2만원쯤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됐다. 치킨 한 마리 덜 사 먹는 셈 치고 카드를 긁었다. 당장 막힌 부분은 해결이 됐지만, 얼마 뒤 또다시 레벨업이 정체되었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사냥터에 가서 자동사냥을 돌리고, 경험치 획득량과 아이템 최대 수납량을 늘려주는 '노터스의 슈퍼 택배(33000원)'도 결제했다.
  좋은 사냥터와 던전에서 자리를 잡다가 다른 유저와 시비가 붙었고, PK 끝에 패배했다. 약이 오른 준봉 씨는 낮은 확률로 전설 장비 아이템을 드랍하는 '존의 유물 박스(3300원)'을 수백 개 결제했다. 과금하고 과금했으며 과금한 끝에 좋은 장비를 맞췄고, 결국 사냥터에서 자신을 쓰러트렸던 유저에 대한 복수에 성공했다. 월등한 스펙으로써 경쟁자를 찍어누르는 느낌은 짜릿했다. 계속해서 더 좋은 장비를 추구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준봉 씨는 자연스레 '린저씨'가 되었다.

 

 

 

리니지M 시리즈와 같은 BM을 적용할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블레이드&소울 2. (이미지 출처 : plaync)

  트릭스터M의 전신(?) 리니지M과 리니지2M은 모두 극소수의 '큰 손'이 지배하는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니지M 시리즈와 같은 비즈니스 모델을 채용한 트릭스터M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대다수의 게이머들이 실망스러운 게임성에 야유를 보냄에도 NC는 여의치 않는다. 리니지M·2M에서 밀려 신생 게임의 군주가 되기 찾아온 원조 '린저씨'들과, 아기자기한 그래픽에 끌려 입문한 잠재 고객들이 게임의 기둥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PC 게임을 사랑했던 소년들이, 이제는 서버의 신화를 꿈꾸며 '린저씨'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는 하반기에 PC MMORPG 블레이드&소울의 후속작인 블레이드&소울 2가 출시될 예정이다. 구글 플레이 스토어 사전예약 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스크린샷 속 UI가 리니지M 시리즈와 동일하다. 게이머 사이에서는 블소2 역시 또 다른 리니지가 아니겠냐는 전망이 우세하다.

  블레이드&소울이 서비스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9년이 지났다. 당시 게임을 즐겨했던 2·30대 유저들은 이제 사회생활에 치여 여가시간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30대, 그리고 예전처럼 무작정 퇴근 후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기 어려운 40대가 되었다. 그들은 NC 소프트에게 여전히 잠재적 캐시카우가 다수 존재함을 확인 시켜 줄까? 아니면 리니지M 식 BM을 고집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의 미래를 바라볼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줄까?